연말이라 그런지 이곳저곳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온다.
나 같은 인간을 불러봤자 실망만 하게 될 뿐인데, 아직 악명이 널리 퍼지진 않았나 보다. 덕분에 매일같이 케이티엑스(KTX)를 타는 날들이 이어지고, 모텔 방에서 홀로 잠드는 밤 역시 늘어간다. 전날은 전라도, 오늘은 경상도, 내일은 경기도로 괴나리봇짐 마냥 가방을 짊어진 채 보부상처럼 떠돌고 있다.
“안녕하세요. 만화가 겸 수필가 김보통입니다.”
가는 곳은 매번 다르지만 인사는 늘 똑같다. 달리 할 말이 없기도 하지만, 내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 테니 빼먹지 않고 소개를 한다. 누군가는 ‘아니, 강연을 보러 온 사람이면 강사가 누군지 당연히 알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행사가 있다니 참가는 하지만 누군지는 상관없는 사람이 세상엔 많다. 장장 두 시간의 강의가 끝난 뒤 “그런데 오늘 재테크 강의한다고 해서 왔는데 언제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때때로 울적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 매번 자신을 소개하는 일이란 눈치 채지 못하게 자신을 마모시키는 과정의 연속인 것만 같다. 나도 베스트셀러 작가였으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그런 생각을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럴 바에 구구절절 나에 대해 소개하는 게, 그런 와중에 틈틈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조금이라도 나은 상황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겠지, 라고 생각할 뿐.
다음 강연 장소로 가기 위해 이동 중 동대구역에 내렸다. 역과 연결된 으리으리한 백화점 건물 앞에 서있자니 한층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조금 남아 백화점 푸드 코트에 들어갔다. 배가 고파 빵을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수없이 늘어선 빵들을 둘러보아도 선뜻 손이 가는 것이 없었다.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친절히 ‘인기 1위’, ‘베스트’ 등의 표식을 단 빵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부지런히 그것들을 주워 담았다. 여전히 내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왠지 그 빵들이 얄밉기까지 했다.
모든 빵은 평등하다. 각자 다른 재료로,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지지만 결국은 모두 빵이다. 그리고 빵은, 팔려서 먹힐 때 그 역할을 다한다. 하지만 이게 쉽지 않다. 인기가 없는 빵은 판매대의 변두리로 떠밀린다. 특별한 장식이나 표식을 얻지도 못한다. 자연히 눈에 띄지 않으니 선택되기도 힘들다. 그래도 드문드문 찾는 사람이 있으니 당장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머지않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기 1위 빵도 안심하기엔 이르다. 지금이야 사람들이 많이 찾지만 익숙해져 버리면 그때는 다른 여느 빵이 그러했듯 판매대의 변두리를 지키다 사라질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커다란 봉지에 담긴 예닐곱개의 생크림 크루아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저 빵 역시 처음은 저렇지 않았을 것이다. 생크림이 녹지 않도록 진열장에 하나씩 낱개로 놓여 있었겠지. 사람들은 겹겹이 바삭한 크루아상과 어우러지는 부드러운 생크림 맛에 감탄하고, 점원은 ‘인기 1위’ 표식을 달아 넣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내 생크림 크루아상에 초콜릿을 덧입힌 것이 나오고, 녹차 크림을 넣은 것이 나오고, 인절미가 올라간 것이 나오고, 버터와 팥 앙금을 넣은 것이 나오면서 밀리고 밀려 이제는 묶음 판매용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거 가져가실래요?”라고 점원이 말했다. “네?”라고 나는 묻자 점원은 “아직은 드실 수 있으니까”라고 덧붙였다. 어느덧 매장 문 닫을 시간이 되었는데 폐기처분 될 빵을 의심스러운 아저씨가 빈 쟁반을 든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호의로 준다는 것 같았다. 나는 얼떨결에 “감사합니다”라고 답한 뒤 점원이 포장해 준 크루아상 봉지를 든 채 백화점을 나섰다.
마침 곧 열차가 출발할 시간이었다. 자리에 앉아 내일 있을 강연에 쓸 자료를 훑어보며 봉지에서 크루아상을 꺼내 물었다. 다행이다. 크루아상에게는 쓰레기로 버려지기 전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변변치 않은 유명세라도 불러주는 곳이 있고 그런 강연에 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나에게도 다행이었다. 우리 서로 용기를 내자,고 크루아상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말할 뻔했지만.
글·그림 김보통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