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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사랑이 죄라고요? 지옥에 빠진 그들

등록 2019-11-27 20:44수정 2019-11-28 02:38

김태권의 지옥 여행
김태권 그림
김태권 그림

겁 없던 어린 시절에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을 펼쳤다가 혼비백산했다. 나만 겪은 일은 아닐 것 같지만. 주석을 함께 보지 않으면 읽기 만만치 않은 텍스트다. 지옥에 입주한 사람이 워낙 다양해서 그렇다. ① 역사에 남은 악인은 당연히 지옥에 있거니와 ② 단테가 안 좋아하던 동시대인들도 지옥에 들어갔다. 지금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 대부분이다. ③ 게다가 단테는 가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도 지옥에 보냈다. 읽는 사람 헷갈리게 말이다. 평생 따르고 존경하던 스승 브루네토 라티니도 지옥에 있다고 단테는 썼다.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랑이 죄라면 나는 유죄”, 이 말이 농담처럼 들리는 까닭은 쓸데없이 비장해서 그렇다. 그런데 사랑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다면 어떨까. 제일 유명한 커플은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일 것이다. 파올로가 시동생, 프란체스카가 형수.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사랑이 없었지만, 시동생과 형수는 서로가 좋았다. 하루는 사랑 이야기가 담긴 책을 둘이 함께 읽다가 파르르 떨며 입을 맞추었는데, 형이자 남편이던 잔초토가 그 장면을 보고 두 사람을 죽였단다.(<신곡> ‘지옥 편’ 제5곡) <신곡> 덕분에 널리 알려진 커플이기도 하다. 둘의 사랑 이야기를 앵그르며 코코슈카며 차이콥스키며 많은 예술가가 작품으로 만들었다.

두 사람은 어떤 벌을 받는가? 영원한 바람에 휩쓸려 다닌다. 단테에 따르면 ‘모든 빛이 침묵’하는 어두운 곳에서 ‘잠시도 쉬지 않는 지옥의 태풍’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이리저리 위로 아래로 휘몰아’ 댄다는 것이다. 바람도 많이 맞으면 아프다. 나는 태풍이 온다던 날 미친 척하고 제주도의 바람이 센 오름에 올라본 적이 있었는데, 온종일 뼈마디가 달각대는 기분이었다. 바람을 맞은 시간이 몇십분밖에 되지 않아도 그랬다.

그런데 사랑에는 남녀의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동성의 사랑도 있다. 단테가 살던 서양 중세는 동성끼리의 사랑을 ‘죄’라고 몰아세우던 편협한 시대였다. 그래서 <신곡>에는 같은 성별의 사람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지옥에 간 사람도 있다.(제15·16곡) 불꽃이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장소라고 한다.

단테에 따르면 ‘사랑하는 브루네토 선생님’과 자기 시대의 존경받던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지옥이 여기다. 스승까지 지옥에 모셔두다니 단테는 무슨 꿍꿍이였을까. 이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고발하려던 의도는 아닌 것 같다. 이들이 지옥에 있는 상황이 ‘내 가슴에 경멸감이 아니라 고통을 심어주었다’고 썼으니 말이다.(제16곡) 어쩌면 단테가 고발하고 싶어 한 대상은 사랑을 ‘죄’라고 몰아세우던 당대의 편협한 의견들일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동성끼리건 이성끼리건 사람을 사랑한 ‘죄’는 비교적 약한 벌을 받는다. 심지어 커플끼리 영원히 붙어 다닐 수도 있다. <신곡>을 보면 지옥의 깊숙한 장소에 처박혀 진짜로 무섭고 잔인한 벌을 받는 죄인은 따로 있다. 사람의 마음을 배신하는 것이야말로 큰 죄다. 제 이익만 챙기고 연인을 버리는 자는 지옥의 황무지에서 온몸이 너덜너덜 찢긴 채 도망 다닌다. 악마가 쫓아다니며 채찍으로 때리기 때문이다.(제18곡) 프란체스카와 파올로를 죽인 잔초토는 꽁꽁 얼어붙은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졌다.(제32곡) 진짜 큰 죄인은 영원한 추위에 떨게 된다고 단테는 읊었으니.

김태권(지옥에 관심 많은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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