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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휴가지에서 벌어진 그 일

등록 2019-12-05 09:48수정 2019-12-05 20:46

헐~
동남아 한 여행지에 있는 남편의 뒷모습. 정은주 기자
동남아 한 여행지에 있는 남편의 뒷모습. 정은주 기자

“우당탕.”

지난 6월 어느 날 새벽 3시께 집이 무너질 듯한 소리에 잠이 깼다. 뛰어나와 보니 남편이 대자로 뻗어 있었다. 취해 들어와 선풍기 선에 걸려 넘어졌다고 했다. 혀 꼬부라진 소리로 아프다는 그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그것은 거대한 ‘삽질’의 서막이었다.

다음날 그는 어깨 보호대를 두른 채 귀가했다. 그 낙상으로 어깨에 살짝 금이 갔다. 여름휴가를 사흘 앞둔 날이었다. 그가 스노클링을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서 에메랄드빛 바다를 즐길 동남아로 휴가지를 정한 터였다. ‘병원 진단서’ ‘혼인관계증명서’ 등을 영문으로 번역해 항공사와 호텔로 취소 요청서를 보냈지만, 수십만원이 수수료로 깨졌다.

밀린 여름휴가는 11월로 잡혔다. 쌀쌀한 날씨에 따뜻한 동남아가 더 매력적이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휴가 첫날, 휴대폰 ‘카톡’이 마구 울려댔다. 취재원의 격한 항의 문자였다. 편집 과정의 실수로 엉뚱한 사람의 사진이 신문에 잘못 나간 것이었다. 밤 비행기를 탄다고 서두르다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상사인 신윤동욱 토요판 에디터에게 연락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나를 대신해 그는 정정 보도를 내고, 취재원을 만나 사과했다. 동남아 섬에서 이 사태와 관련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도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휴대폰만 쳐다봤다. 죄스러워서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모든 게 그날 새벽 3시, 그의 삽질 탓이다, 괜히 원망이 남편을 향했다. 내 매서운 눈초리를 피하며 그는 바다로 달아났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랴, 휴가까지 망치지 말자, 마음을 다잡았다. 어, 근데 휴대폰이 어디 갔지. 휴대폰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내 휴대폰 못 봤어?” 바다에서 돌아온 그에게 물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는 수영복 호주머니를 주섬주섬 만졌다. “네가 하도 정신없어서 내가 챙긴다는 게….” 에메랄드빛으로 물든 휴대폰이 그의 손에 놓여 있었다. 초조한 마음에도 화장실은 급했고, 잠시 휴대폰을 두고 간 게 이 사달을 만들었다. 아, 이 삽질의 끝은 어디인가!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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