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활 타는 지옥의 불길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인 지옥의 이미지일 터. 그래서인지 불지옥은 종류도 많다.
불교에는 죄인의 입이나 항문에 끓는 구리물을 붓거나 죄인을 끓는 쇳물에 집어넣는 지옥이 있다. 구리의 녹는점은 1천도, 철의 녹는점은 1천5백도가 넘는다. 참고로 튀김 할 때 기름은 2백도가 안 되며, 물의 끓는점은 1백도다. 한편 기독교의 게헨나와 이슬람의 자한남 등 유명한 불지옥은 죄인에게 직접 불을 댄다. 불길이 사람 영혼을 연료 삼아 영원히 타오른다나. 사람의 영혼이 이처럼 대단한 에너지 자원일 줄은 몰랐다. 아무튼 이런 곳에 떨어지면 비명 지르기 바빠 연비 계산할 틈도 없겠지만 말이다.
단테의 <신곡>에도 불지옥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지옥 외곽의 죄인보다는 무거운 죄를, 얼음 지옥에 가는 죄인보다는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들이 머무는 장소다. 그런데 불지옥 깊은 곳에 오뒷세우스(오디세우스)가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유명한 영웅 말이다. 이렇게 하여 단테와 단테의 안내자 베르길리우스와 오뒷세우스가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지옥에서 오뒷세우스를 만나다니! 나처럼 고전문학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가슴 설레는 이야기다. 왜?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14세기에 <신곡>을 썼다. 기원전 1세기 사람 베르길리우스를 지옥 여행의 안내자로 삼은 것은, 이 고대 로마의 시인이 <아이네아스>라는 서사시에 저승 여행 장면을 넣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르길리우스가 저승 이야기를 시로 쓴 것은 기원전 8세기께 활약한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계 시인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흉내 낸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오뒷세우스는 말하자면 서양 문학에서 저승 여행의 원조라 할 수 있다. 고대와 중세 문학의 저승 여행 3대가 모이는 장면이 어찌 벅차지 않을까.(나만 신났나.)
오뒷세우스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자기의 마지막 모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향에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뒷세우스는 세상의 끝을 향해 새로운 모험을 떠나자고 사람들을 설득했단다. “(세상의 끝을) 경험하고 싶은 욕망을 거부하지 마라. 그대들의 타고난 천성을 생각해보라. (우리는) 짐승처럼 살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덕성과 지식을 따르기 위함이었으니.” <신곡> ‘지옥 편’ 제26곡에 나오는 감동적인 구절이다.(김운찬 옮김) 결국 일행은 바다에 빠지는 바람에 저승에 오게 되었지만 말이다.
과연 오뒷세우스다. 멋이 철철 넘친다. 이 연설에는 절절한 사연이 있다. 이탈리아의 지식인 프리모 레비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갇혀있을 때의 일이다. 수용소에서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학대를 당하던 중 단테의 이 구절이 떠올랐다고 한다. 동료들과 이 구절을 곱새기며 인간의 긍지를 잃지 않고 버텨냈다고 한다. “고전 따위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답할 때면 도쿄경제대 교수이자 양심적 지식인인 서경식 선생이 자주 언급하는 일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문제는 오뒷세우스가 타고난 거짓말쟁이라는 점이다. 유명한 ‘트로이 목마’를 만든 사람이 오뒷세우스 아닌가. 지옥에 떨어진 것도 트로이아 사람들을 속여 나라와 목숨을 빼앗은 죄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주장을 얼마나 믿어야 할지는 모를 일이다. 한 가지만 더. 프리모 레비는 결국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버티고 버텨 살아서 수용소를 나온 지 40여 년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김태권(지옥에 관심 많은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