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걷는 지옥이 있다. 벌 받는 사람들 목이 반대로 꺾여 있기 때문이다. ‘얼굴이 등 쪽으로 돌아가 있어, 앞을 바라볼 수 없으니 그들은 뒤로 걸어가야만 했다.’ 단테가 쓴 <신곡> ‘지옥편’의 제20곡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상하다. <신곡>에 나오는 지옥은 모두 아홉 단계인데, 여기는 여덟 번째 단계. 꽤 심한 벌을 받는 곳이다. 거꾸로 처박힌 채 발바닥에 불이 붙는 벌(제19곡)과 펄펄 끓는 역청에 담겨 꼬챙이에 찔리는 벌(제21곡) 사이다. 그런데 그런 무서운 장소치고는 벌이 약해 보인다. 뒤로 걷는 사람이라면 이른 아침 동네 약수터에서도 자주 만나지 않던가.(심지어 뒤로 손뼉도 치더라.)
어째서 이것이 굴욕적인 벌이라고 단테는 주장하는가? 이들이 누구였냐 살피면 답이 보인다. 예언가와 점쟁이, 인간에게 허락된 지식을 넘어서려던 사람들이다. ‘보아라, 너무 앞을 보려 했기 때문에 이제는 뒤를 바라보며 뒤로 걸어간단다.’ 앞을 내다보던 사람을 뒤만 보게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 이 벌의 핵심이다. 불지옥의 신체 고문도 무섭지만, 이렇듯 굴욕적인 맞춤형 고문도 끔찍하다. 살아생전에 하던 일을 영원히 후회하게 될 테니까.
이승에서 저지른 것과 정반대로 저승에서 벌 받는 일을 단테는 ‘콘트라파소’라고 했다.(옛날 이탈리아말로 contrapasso.) 반대로(콘트라) 겪는다는(파소) 뜻이다. 말은 어렵지만, 내용은 낯설지 않다. ‘단테 작품 속 천벌 같네요. 덩치 크고 폭력적인 사람이 늙고 병들어 무력한 신세가 되다니.’ 20세기 미국의 하드보일드 작가 로스 맥도날드의 <블랙 머니>라는 작품에 나오는 문장이다. 케첼은 이 범죄 소설에 ‘만악의 근원’으로 나오는 악당이다. 탈세며 도박이며 협박이며 폭행이며 온갖 나쁜 짓을 하고 다니다가 어느 날 픽 쓰러졌다. 뇌졸중 같은 병이었나 보다. 혼자서는 몸도 가누지 못하는 처지. 그런데도 쉴 새 없이 도망을 다녀야 한다. 옛날에 괴롭히던 사람들한테 이제 해코지 당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맞춤형 고문은 잔인하다. 당하는 사람한테는 갑절로 굴욕이다. 그런데 보는 사람은 어떨까? 고문이 일어나는 장소가 지옥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잘못한 사람이 벌을 받는 곳이다. <신곡>을 번역한 김운찬 선생은 콘트라파소를 ‘인과응보’라는 말로 옮겼다.(제28곡) 지옥의 잔인한 장면을 보며 오히려 통쾌하게 여길 수도 있다. 현실에서 우리는 바르게 산 사람이 고통받고 뻔뻔한 사람이 잘 나가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본다. 그래서 잘못한 사람을 우리는 상상으로라도 벌주고 싶다. 이것을 있어 보이는 말로 ‘시적 정의’라고 부른다.
프랑스 작가 라블레가 쓴 <팡타그뤼엘>의 제30장에는 저승 장면이 나온다. “이 세상에서 대귀족이었던 사람들은 저 세상에서 밥벌이를 하며 불쌍하고 초라한 삶을 살아가게 마련이지요. 반대로 철학자들과 이 세상에서 궁핍했던 사람들이 저 너머 세상에서는 자기들 차례를 만나 대귀족이 된답니다.” 이승의 나라님들은 저승에서 삯을 떼이는 품팔이꾼이 된다. 거지 철학자였던 디오게네스가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부려먹고 몽둥이로 패는 곳이다. <팡타그뤼엘>의 지옥 여행자는 “이들을 보며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한다. 라블레가 다시 태어나 오늘날의 유명한 사람들을 등장시켜 지옥 이야기를 새로 써주면 재밌겠다.
김태권(지옥 여행에 관심 많은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