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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달라진 숟가락 천국 거주민

등록 2020-01-31 14:25수정 2020-01-31 14:41

김태권의 지옥 여행
그림 김태권 만화가
그림 김태권 만화가

이제는 옛날 노래가 되었지만, 아이언버터플라이의 ‘인아가다다비다’라는 작품이 있다. 사이키델릭 록을 대표하는 17분짜리 명곡이다. 제목은 무슨 뜻일까. 허세 가득한 말투로 “에덴의 동산에서(인 더 가든 오브 에덴)”을 발음하면 저렇게 들린다는 설명이 있다.

우리말로 옮겨놓으니 찬송가 제목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이를 풍자한 작품이 있다. 역시 옛날 만화 영화가 되었지만, <심슨 가족>에 나오는 장면이다. 바트 심슨이 이 곡에 “에덴의 동산에서”라는 제목을 붙여 찬송가와 바꿔치기했다. 교회는 17분 동안 록 콘서트장처럼 되고 화가 난 러브조이 목사는 아이들을 닦아세운다. “너희 중 범인이 있어. 내가 하는 말 따라 해봐라. ‘사실대로 고백하지 않으면 난 지옥 불에 떨어져서 불타는 석탄을 삼키고 끓는 콜라를 마시며…. 굶주린 새의 부리에 혀를 찢길 것이다.’” 겁먹은 아이가 소리친다. “바트요! 바트가 범인이에요!”(시즌7의 4화)

<심슨가족>에 나오니 웃고 말지만, 요즘 세상에 저러다가는 경을 칠 것이다. 하드고어 테마파크 같은 지옥 묘사로 사람을 겁주는 일은 지난 시대의 이야기다. 요즘 유행하는 지옥은 다르다. ‘긴 숟가락 지옥’ 이야기에 따르면 저승에는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다. 푸짐한 식탁과 자루가 긴 숟가락이 있을 뿐이다. 착한 사람이 모인 식탁은 서로 음식을 떠먹여 모두 배부르지만, 나쁜 사람이 모인 식탁은 제 먹을 것만 챙기다가 모두 굶는다고 한다.

유혈 낭자하지는 않아도 고통스러운 지옥이다. 성대한 만찬을 앞에 두고 배를 곯는다는 맞춤형 고문이 그리스 신화 속 지옥과 닮았다. 게다가 고문하는 악마도 없다. 죄인이 괴로운 까닭은 제 탓이다. 셀프 지옥이다. 스스로를 탓하는 마음의 고통도 상당할 터.

사실은 허술한 이야기다. 미국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잘 꼬집었다. 금주법 시대의 영리한 악당 너키 톰슨이 주인공이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스티븐 부세미가 이 역을 맡았다. 긴 숟가락 지옥 이야기를 듣더니 안 그래도 찌푸린 얼굴을 더 찌푸리며 한마디 한다. “이해가 안 돼. 숟가락을 짧게 잡으면 되잖소?”(시즌2의 11화)

그런데도 긴 숟가락 지옥은 유명하다. 어찌나 인기가 많은지 신부님도 목사님도 스님도 유대교 랍비도 자기네 종교 이야기처럼 가져다 써서, 처음에 어디서 나온 이야기인지 밝히기 어려울 정도다. 숟가락을 잘 안 쓰는 중국에도 ‘긴 젓가락’ 이야기가 있다니 말이다. 나는 이 글에서 긴 숟가락 지옥의 출전을 찾아보고 싶었으나 곧 포기했다. 그 대신에 두 가지 사실을 생각했다.

① 하나는 지옥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지옥도 이제는 밑도 끝도 없이 고문만 당하는 곳이 아니다.

② 또 하나는 착한 일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이 바른 사람이고 착한 사람이었다. 고문당하다 죽은 순교자, 남을 구하고 대신 죽은 의인, 후손까지 굶기는 독립운동가 같은 사람이 가던 곳이 옛날의 천국이다. 그런데 긴 숟가락 천국은 다르다. 자기 손해는 보지 않겠다는 사람도 천국에 간다. 게임이론에서 말하는 ‘최적의 해’를 좇는 합리적 주체도 너키 톰슨처럼 영악한 부자도, 이제 저승에서마저 배불리 지내게 됐다. 좋은 일인지 아닌지 나는 모르겠지만.

글·그림 김태권(지옥에 관심 많은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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