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인가, 고등학생 때인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우리 집 마루에 떡하니 큼지막한 소파가 들어와 있었다. 원래 여름철이면 강화도 화문석이나 대자리, 겨울이라면 (진짜는 아니었을) 페르시아풍 카펫이 깔렸었는데, 나는 그날 저녁을 먹고, 과일을 깎고, 티브이(TV)를 보면서 꽤 어색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 집은 대개 어머니께서 부엌에 상을 차리시면, 그걸 통째로 마루로 들고 와 밥을 먹고, 상을 물린 후 사과나 참외 등을 먹으면서 뒹굴뒹굴하는 풍경이었는데, 갑자기 너댓명 분의 기다란 의자가 생기니 저기 위에 올라가 앉아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하던 대로 바닥을 고수해야 할지 잠시 고민이 되었다. 소파를 주장해 관철하신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나는 소파 위에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야 했지만, 어쩐지 40㎝ 아래 바닥에 앉아 계신 할머니와 아버지께 불경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가 아마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은 다들 그 소파가 너무 높다고 느꼈고,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적당히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바닥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는 쪽으로 타협을 보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파는 집안의 여느 가구처럼 익숙해졌고, 각자 편한 대로 올라타든 내려오든 선택은 자유였지만, 소파를 잘 쓰기 위해서는 적당히 나지막한 커피 테이블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소파에 앉은 상태로 발을 바닥에 붙이고 몸을 뒤로 눕혀서 티브이를 보는 건 상당히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커피 테이블 위에 두발을 꼬아서 올려놓아야 뭔가 밸런스가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다.
어찌 됐든 우리 집 마루는 언제부턴가 거실로 불리게 됐고, 큰 덩치의 검은 플라스틱 텔레비전이 합세하면서 결국 ‘티브이 룸’(TV room)이 되었다. 지금 부모님 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벽에 걸린 티브이를 향해 소파와 안락의자가 모두 한쪽으로 정렬한 모습이다. 나는 지금도 소파 앞 마룻바닥에 널브러져 앉는 걸 선호하는데, 굳이 소파에 앉는다면 다리를 끌어올려 양반다리를 하거나, 아예 긴 의자(Chaise)에서 다리 뻗고 늘어져 있는 게 좋다. 그렇다면 우리 집 거실엔 왜 계속 소파가 놓여야 할까? 예전 로코코풍 꽃문양의 푸톤(futon) 소파로부터 지금의 이탈리아산 가죽 소파에 이르기까지 그다지 필수적이지 않은 가구가 이렇게나 넓은 면적을 차지하게 된 것이 의문스럽다.
그리스식 클리스모스(다리가 우아한 의자)를 재현한 의자. 사진 최이규 제공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앉는다는 건 뭘까? 글쎄, 이렇게 쉬운 질문에 인류가 아직 정확한 답을 못 내리고 있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의자에 앉고, 어떤 문화는 바닥만을 고수할까? 열대와 온대의 차이도 아닌 것 같고, 건조함과 습함의 차이도 아닌 것 같다. 기술력의 차이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타지마할을 지었던 뛰어난 기술력의 무굴 제국 샤자한과 왕비도 바닥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온돌 바닥 사랑과 긍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피부가 아플 정도로 뜨거운 방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상황이 불만스러웠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저 따끈한 구들방에 앉아 이불을 나눠 덮고 먹는 찐 고구마나 호빵 정도는 찬성이다.
선택할 수 있다면, 나의 ‘최애’ 바닥은 역시 목재 마룻바닥이다. 증조할아버지가 손수 지으셨다던 어릴 적 우리 집의 마루는 수만번의 걸레질에 반들반들해진 고목의 주름 자체였다. 검고 깊은 색깔과 옹이구멍 아래로 지나다니던 고양이가 생각난다. 한여름 땡볕에 벌겋게 달아오른 몸이라도 가방을 벗어 던지고 마루에 누우면 포근한 냉기가 느껴졌는데, 지금 생각하면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경험이었다. 조계사 새벽 예불에서 느꼈던 마루나, 송광사 약사전의 마루, 교토 용안사 마루의 촉감도 기억에 남는다. 양탄자가 빽빽하게 깔린 이스탄불 블루모스크의 바닥 또한 장관이다. 그 위를 맨발인 사람 수천명이 채우고 있다. 이슬람 사원 앞에 늘어선 세족대가 무척 실용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귀족의 높은 침대. 사진 최이규 제공
요즘엔 ‘바닥=동양식’, ‘의자=서양식’인 듯 여기지만, 학자들은 유럽에서 의자와 가구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때를 17세기 이후로 본다. 그 이전 가옥의 내부를 다룬 회화를 보면, 유럽인들도 대부분 바닥에 주저앉거나 널브러져 쉬거나 잠을 청하고, 변변한 의자와 테이블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딱딱한 스툴(stool)이나, 등받이가 없는 나무 벤치 정도는 꽤 흔했지만 요즘 같은 의미의 의자(chair)는 아니었다. 중세 시대의 의자란, 성당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오로지 가장 중요한 한 사람(사제)을 위한 상징이었다. 지금도 체어맨은 곧 가장 높으신 회장님을 일컫지 않는가? 서양 중세의 의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앉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애초에 앉을 사람을 고려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직각으로 각이 지게 만들어졌다. 의자는 자체로 권위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근정전 내부를 보면 일월오봉도 앞에 위치한 옥좌 외에, 신하들을 위한 의자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베르사유 궁전 루이14세의 침실도 마찬가지였다. 서 있는 사람 중에서 앉는다는 것은 대단한 공간적 차등을 만들어낸다. 물론 하강한 시선의 위치를 보정하기 위해 자리와 침대는 높였다. 그래서 침대도 때로는 계단을 딛고 올라야 할 정도로 높았다.
바닥에 앉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평등하며, 민주적이고, 친밀함을 준다. 그에 반해 우리 집에 처음 소파가 들어왔을 때 느꼈던 불편함은 의자라는 가구에 내재한 귄위적인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러한 권위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다. 그래서 왕의 용상이나 중세 수도원의 의자보다 지금의 의자는 훨씬 편하게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의자가 애초 앉는 이의 안락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앉는 이의 권위를 위해 만들어졌다면, 왜 언제부터 의자가 편안함을 추구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진다.
미스터리 문학의 대가, 애드거 앨런 포가 병약했던 아내 버지니아를 위해 마련한 흔들의자. 사진 최이규 제공
유럽에서 가구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가정은 네덜란드 사람들이라고 한다. 네덜란드는 소위 신흥 부자 나라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여타 유럽 국가들처럼 농업에 기반을 둔 경제가 아니라, 무역을 통해서 성장한 국가다. 주인과 다수의 종으로 이루어진 프랑스 농가와 달리, 암스테르담의 무역상들과 그 직원들은 각자 자기 집을 갖고 살았다. 농업 사회에서 상층 계급 자녀의 양육 및 청소와 음식 조리 등 대부분의 집안일은 하층 계급 노동력이 담당했는데 반해, 네덜란드의 여성들은 상당한 부유층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자녀를 양육하고 집안일을 수행했다. 이러한 여성들에게 가구는 상당한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장 어린아이를 재우는 데 사용되는 흔들의자(nursery chair)를 예로 들 수 있다. 경제력을 갖춘 여성이 직접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좀 더 편리한 쪽을 연구하게 된다.
상층 계급 가정 내에서 여성의 역할과 지위가 확대될수록 이들을 돕기 위한, 동시에 다양한 미적 욕구를 만족하게 하기 위한 의자와 가구들이 출현했다는 것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정답도 없는 문제라,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요약하자면 의자의 사용은 가족 구성원 간의 동등한 관계 구축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좀 더 본질적으로는 산업 구조의 변화에 의해 생긴 가족의 변화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가족 관계의 형태가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요즘 같은 탈산업시대에 의자보다는 다시 바닥으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최이규(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