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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지옥의 모델은 이승

등록 2020-02-28 13:49수정 2020-02-28 13:51

김태권의 지옥 여행
김태권 그림.
김태권 그림.

학창시절에는 체벌도 얼차려도 일상이었다. 하염없이 두들겨 맞건 발을 창틀에 올리고 엎드려 있건, 우리가 궁금한 것은 딱 하나였다. ‘이 시간이 언제 끝나나?’

그래서일까. 크리스트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지옥이 왕년에 혼 좀 나본 내가 보기에는 가혹한 것 같다. 죄에도 경중이 있는데 살인마, 좀도둑과 그저 믿음이 없다는 이가 동일하게 혼이 난다니 이상하다. 죄는 유한한데 벌은 무한하다니. 지옥 생활이 언제 끝난다는 시한이 있는 편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이상한 점은 또 있다. 이승에서 과거의 죄를 뉘우치면 저승에서 지옥에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일단 죽고 난 다음에는 회개도 소용이 없다. 지옥에서 아무리 자기 과거를 뉘우쳐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버스 떠난 다음에 손 흔들어도 소용없다”는 걸까.(시내버스 기사님의 고충은 물론 이해한다.) 하지만 첫차가 막차인 데다 다음 버스도 영영 없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이상하다. 벌 받는 시간이 영원하다는 점도 이상하고, 지옥에 떨어진 다음에는 아무리 애써도 소용없다는 점도 이상하다. 영원한 지옥의 이 두 가지 이상한 점은 우리 사회의 입시지옥하고도 살짝 닮았다. ‘젊을 때 몇 년’에 따라 결정된 학벌의 격차가 평생을 따라다닌다는 사실도 이상하고, 일단 격차가 벌어진 다음에는 죽을 만큼 노력해야 극복할까 말까 하다는 현실도 이상하다.

한편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지옥도 상상한다. 다른 문화권에는 시간을 정해놓고 벌 받는 장소도 있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연옥은 죄인이 오랜 시간 죄를 씻고 언젠가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공간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인간 세계에서 죽으면 지옥 세계에서 환생하는데, 여기서 업을 씻으면 다른 세계로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감옥에 간 친구를 위해 민원도 넣고 면회도 가는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이를 위해 열심히 빌어주면 벌 받는 곳에 머무는 시간도 줄어든다고 한다.

영원한 지옥보다는 여기가 나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시한부 지옥’에 대해서도 비판이 있다. 당사자는 죽었어도 남은 가족이 노력하면 지옥이나 연옥 생활이 짧아진다는 이야긴데, 그렇다면 돈 많고 잘 나가는 집안사람은 죽어서도 유리한 것 아닐까? 가난한 집 사람은 당장 먹고 살기 바빠 죽은 부모를 챙길 틈이 없지만, 잘 나가는 집 사람은 남들 한번 올릴 제사를 두번 세번 올리며 정성을 들일 수 있다. 가문에 따라 저승 생활도 달라진다면 너무 서글픈 이야기다.

그렇다고 꼭 그렇게 나쁘게만 볼 일인지도 모르겠다. 죽은 가족을 위해 뭐라도 할 수 있으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그 일을 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닌가. 가톨릭에는 위령미사가 있고 불교에는 우란분재가 있다. “죽은 어머니가 미륵 부처를 뵙기를 빌며” 만들어 바친 고구려 시대의 금동미륵상도 있다. 남은 사람들의 이 간절한 마음을 그저 비웃기만 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또 나는 입시지옥을 생각한다. 기성 종교를 기복신앙이라며 비판하던 사람도 가족을 저승에 보내면 태도가 바뀌듯, 학벌주의를 욕하던 사람도 자녀가 수험생이 되면 남과 다른 선택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군다나 이 ‘학벌사회’에서 말이다. 지옥의 모델은 이승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헬!

김태권(지옥에 관심 많은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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