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종교가 요즘 입길에 오른다. ‘한국에 하느님 20명, 재림예수 50명 있다’는 표제의 <한겨레21>의 기사도 화제다. 풍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재림예수101>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한다. 한편 신흥종교를 나쁘게만 말하지 말라는 쪽은 지금 존중받는 기성종교도 처음에는 신흥종교 아니었느냐고 지적하는데, 판단은 독자님 각자의 몫일 것 같다.
지옥 문제에 관심 많은 나로서는 신흥종교의 창시자가 가지는 특권이 대단해 보인다. 한마디로 ‘지옥 설계권’이다. 지옥 이 이렇게 생겼다고 한마디씩 던지면 나중에 경전 편찬자들이 지옥의 모습을 정리해줄 것이다. 누가 지옥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지 않는지 정할 자격도 있다. 그런데 새 종교를 만든 사람이 좋지 않은 점도 있다. 다른 종교에서 “저 사람 지옥 갈 것”이라고 공격할 확률이 100%라서 그렇다. 종교는 경쟁이 심한 분야다.
억울한 사례의 하나로 데바닷타의 경우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데바닷타는 석가모니의 성실한 제자였다. 엄격한 수행으로 불교를 믿던 사람들 사이에서 한때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자기에게도 남에게도 지나치게 엄격하게 굴어 문제였던 것 같다. 부처님의 다른 제자들과 불화를 빚고 결국 뛰쳐나와 자기 교단을 세웠다. 여기까지는 있을 법한 이야기다. 그런데 그다음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미심쩍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앙심을 품은 데바닷타는 부처님을 암살하려고 별별 음모를 꾸몄으며 마침내 손톱에 독을 바르고 석가모니께 달려들다가 땅이 꺼지는 바람에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앞의 데바닷타와는 다른 사람 같다. 나처럼 이야기 만드는 사람들끼리는 이럴 때 ‘캐릭터의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표현을 쓴다.
역사 속 데바닷타는 어땠는가. 당나라 스님들이 인도에 다녀와 남긴 기록이 있다. “이 구멍은 땅이 열려 데바닷타가 지옥으로 빠진 곳입니다.” ‘성지순례 가이드’가 큰 구멍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단다. 사실 여부를 떠나 데바닷타의 암살미수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근거일 터이다. 반면 “데바닷타를 따르는 신자들이 수백년이 지난 아직도 인도에 남아 불교 교단과 경쟁 중”이라는 스님의 기록도 있다. 데바닷타가 불교에서 갈라져 나온 신흥종교의 창시자였다는 의미다. 이렇게 보니 그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다르게 읽힌다. 데바닷타로서는 억울할 노릇이리라. 그래서인지 나중에 나온 불교 경전에는 데바닷타가 석가를 해치려던 것이 아니었으며 지옥에 가지도 않았다는 해석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신흥종교 창시자처럼 수고하지도 않으면서 제 마음대로 지옥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바로 시인과 이야기꾼이다. 호메로스가 <오뒷세이아>에서 저승여행 장면을 묘사한 뒤로, <신곡>을 쓴 단테도 <가르강튀아>를 쓴 라블레도, 숱한 이야기꾼들이 자기 마음대로 지옥을 만들고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마구 지옥에 집어넣었다. 종교 지도자와 진지한 철학자가 보기에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종교와 도그마적인 철학에서 시인들은 대접이 좋지 않다. 가톨릭의 교황청은 한때 ‘부도덕한 작품을 쓰는 작가’들과 갈등을 빚었고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도 시인을 좋아하지 않았고 철학자 플라톤은 시인 추방론을 논했다. 아무려나 시인이나 이야기꾼이 모인 저승의 공간이 있다면 그 말석에 내 자리가 작게나마 놓이기를 나는 바랄 뿐이지만.
김태권(지옥에 관심 많은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