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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지옥을 이용한 자들, 그들은 정치인

등록 2020-03-25 22:18수정 2020-03-26 02:56

김태권 그림
김태권 그림

“너 보기 싫어. 차라리 죽어버려.” 홧김에 말했는데 다음날 그 사람이 죽는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지옥에나 가버리라”는 말 역시 입에 담을 말은 아니다. 이야기꾼이 제 맘대로 지옥을 설계할 힘이 있다고 해도 “얼마 전 죽은 아무개는 지옥에 있다”며 남을 마구 지옥에 넣지는 않는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거리낌 없이 지옥에 보내는 경우가 있다.(종교인끼리 서로 지옥에 보내는 사정은 일단 접어두자.) 똑똑하고 양심적인 사람조차도 정치적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은 지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정치적 격변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사람들의 것이다.” 한때 입길에 오르던 문장이다. 단테가 <신곡>에서 저리 말했다는 것이다. 척 봐도 이상하다. 이 칼럼의 독자님은 아실 터, 단테가 설계한 지옥 밑바닥은 꽁꽁 얼어붙은 얼음 지옥이다. 그나마 비슷한 <신곡>의 구절을 찾는다면 “(악을 행한) 치욕도 없고 (선을 행한) 명예도 없이 살아온” 사람과 천사가 지옥 입구에 발이 묶인 채 울부짖는다는 정도다.(‘지옥편’ 제3곡) 천국에는 못 가지만 지옥에도 안 갔으니 복지부동으로 일관한 인생치고 나쁘지만은 않다.

엉뚱하게 인용하기 시작한 사람이 누구일까. 루스벨트 대통령이라고도 하고 케네디 대통령이라고도 하는데, 모르겠다. 아무려나 원래 평범한 구절이 입에 오르내리던 중, 정치에 대한 견해가 다른 사람을 지옥에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거친 마음이 조금씩 덧붙어 이 무시무시한 저주로 변한 것은 아닐까.

그래도 선거철이니 이런 경우 초들기 좋은 대목을 소개하련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가운데 그리스 사람 ‘솔론’의 전기가 있다. 솔론은 아테네에 법을 만든 사람인데, 격변기에 어느 편도 안 들고 몸만 사리는 이에게 벌금을 물렸다. 시민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구실이다. 물론 요즘 같으면 시민의 의무를 다하느니 벌금 물고 말겠다는 사람도 좀 있겠다. 지옥 대신 벌금이라니까.

그렇다고 단테가 지옥을 정치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적극적으로 써먹었다. 나름 이해가 되는 면도 있다. 단테는 당시 도시국가 피렌체를 휩쓴 정치 투쟁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망명객이 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당에 대한 원한이 사무쳤으리라.

피렌체에서 다른 시대를 살았던 마키아벨리의 경우도 있다. <군주론>으로 유명한 마키아벨리지만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살아생전에 그가 주목받은 이유는 재치 있는 드라마를 쓴 이야기꾼이어서였다. 그런 마키아벨리가 정치인 시절 자기 윗사람이던 소데리니에 대해 쓴 글이 있다. 소데리니가 죽은 후 지옥에 갔더니 문지기가 쫓아내더란다. “지옥에 올 자격도 없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가 죽어서 간다는 림보에나 가라.” 소데리니가 세상 물정 모르는 무능한 정치 지도자였고 그래서 자기까지 패배했다는 원망이 깃든 이야기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 단테도 마키아벨리도 자기 시대에는 죽고 사는 문제였겠지만, 오늘날 독자의 눈에는 부질없어 보인다. 주석이 없으면 이해가 안 되고, 주석을 읽어도 공감은 안 된다. 고작 수백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정치적 흥분이 가라앉으면 남는 것은 민망함뿐인데, 지지하는 당파가 다르다고 영원히 지옥에 보낼 것까지야. 선거철을 맞아 하고 싶던 이야기다.

김태권(지옥에 관심 많은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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