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버들이 차는 시게가 여름 패션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필자의 직업은 물과 하등의 관련이 없는 월간지 에디터다. 물에 떠 있을 순 있지만, 접영은 엄두도 못 내는 정도의 수준이다. 그런데도 수심 200m에서 방수가 되는 시계를 차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다이얼에는 ‘DIVER’S 200m’라는 글자를 자랑스럽게 써놓은 시계. 방수 성능을 강화한 시계를 다이버 시계라고 부른다. 시계 애호가들이 구구단처럼 외고 다니는 롤렉스의 ‘서브마리너’와 오메가의 ‘씨마스터’가 모두 다이버 시계다. 의역하면 ‘바다의 왕자’쯤 될까?
다이얼에 물결무늬를 넣은 오메가의 ‘씨마스터 다이버 300M’. 사진 오메가 제공
그렇다면 여느 시계의 방수 가능 깊이는 어느 정도일까? 모델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일반적으로 30~50m다. 수치만 보면 이 정도면 충분해 보인다. 문제는 이 시계들이 실상 그 정도 방수가 안 된다는 데 있다. 시계에서 ‘30m 방수’라는 것은 통제되는 환경에서 3기압에 해당하는 압력을 얼마간 견뎠다는 뜻이다. 현실 세계에서 으레 존재하는 유속을 비롯한 다양한 변인들을 제조 실험에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시계를 찬 채 손만 닦았는데도 시계 유리 안쪽에 습기가 맺혔다는 ‘안습’ 리뷰 글을 인터넷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 필자도 30m 방수 시계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손을 닦을 때마다 수압을 약하게 해놓고 아기 얼굴 씻기듯 조심한다. 폭우라도 오는 날에는 아예 찰 엄두가 안 난다. 반면 다이버 시계는 샤워나 설거지는 물론, 수영할 때도 풀 필요가 없다. 상전처럼 모시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모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태도와 관련이 있다. 물건을 지나치게 애지중지 다루는 사람 옆에 있으면 덩달아 불편하고 불안해진다. 앞서 언급한 롤렉스의 ‘서브마리너’의 기본 모델 가격은 960만원이다. 오메가 ‘씨마스터’ 모델도 엔트리(입문) 제품의 가격이 600만원대다. 어마어마한 가격이지만, 그렇다고 손목에 깁스라도 한 것처럼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계가 내 손목에 올라탄 것이 아니라, 내가 시계를 찬 거니까. 이러려면 먼저 시계의 내구성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물샐틈없는 엄밀성, 어딘가에 부딪혀도 문제없이 구동되는 안정성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국제표준화기구인 아이에스오(ISO)의 6425항목을 살펴보면 다이버 시계로서의 자격 요건은 여럿이다. 일정 수준의 충격 저항, 내부식성, 자기 저항 등의 테스트를 두루 통과해야만 공식적으로 다이버 시계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다이버 시계의 인덱스는 야광인 게 좋다. 사진 파네라이 제공
시계를 단단하게 만들다 보니 생긴 특징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두께다. 그냥 끼워서 넣어도 될 뒤판을 다이버 시계들은 나사처럼 돌려서 끼우도록 설계되어 있다. 좁은 틈이라도 생겨 물이 새어 들어가면 안 된다. 그러다 보니 케이스가 두꺼워진다. 크라운(시간을 맞출 때 쓰는 케이스 옆면에 붙은 작은 기둥) 역시 그냥 잡아 빼는 방식이 아니라, 돌려서 끼우고 빼야 한다. 손가락으로 잡고 돌릴 일이 많으니 크라운을 큰 사이즈로 설계하고, 마찰력이 높아야 하니 크라운 옆면에 홈을 깊게 판다. 잠수하다가 크라운이 부러지는 불상사가 없어야 하므로 크라운 양옆에 기둥도 세운다.
다이버 시계는 크라운 기둥이 있어 더 단단하다. 사진 브라이틀링 제공
과거 잠수부가 실제 사용한 측정 장비이기에 생긴 특징도 있다. 심해에서도 시간을 확인해야 하니 인덱스(다이얼의 숫자 부분)와 핸즈(시침, 분침, 초침) 부위에 많은 양의 야광 도료를 바르는 것이다. 도료를 많이 바를수록 좋기에 인덱스와 핸즈는 크고 뚱뚱해진다. 그러다 보니 다이얼이 커졌고 케이스 사이즈도 덩달아 조금씩 늘어났다. ‘드레스 워치’(손목시계 중 격식 차리는 용도의 시계) 케이스의 직경은 대개 37~42mm지만, 다이버 시계 직경은 대개 40~45mm다. 또한 잠수부는 수중에서 머무는 시간을 정확히 확인해야 하니 케이스 위에 초 단위를 표시한 베젤(시계 계기판을 보호하는 유리나 플라스틱 등을 고정하기 위한 홈)을 얹는다. 시곗줄은 소금물에 강한 고무나 금속을 주로 활용한다. 이런 다채로운 요소가 모여 하나의 조형미를 만들었다. 크고 강한 기계적인 이미지다. 그러니까 필자가 접영도 못하면서 다이버 시계를 차는 건 기능이 아닌 내구성과 조형미와 이미지 때문이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사람만 에스유브이(SUV)를 타는 건 아니니까.
다이버 시계가 ‘여름 특산물’로 각광 받는 것은 바다와 관련된 패션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브랜드마다 파란색 모델을 출시하고 있다. 유행과 관련 없이 꾸준히 팔리는 검은색을 제외하면 파란색의 판매량이 가장 높다. 오메가의 ‘씨마스터’의 경우 다이얼에 아예 물결 문양이 새겨져 있다. 시계 뒤판에 잠수부나 파도를 음각하는 건 흔한 일이라서 브랜드를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다. 최근 바다에서 건져 올린 폐그물망과 낚싯줄을 재활용해 만든 스트랩을 판매하는 브랜드도 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다이버 시계는 크고 두껍다. 반소매 티셔츠와 특히 잘 어울린다. 재킷 소매 아래서는 터무니없이 커 보이는 시계가 티셔츠와는 균형이 잘 맞는다. 게다가 이건 단순히 비례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름이면 몸이 드러나고, 드러나는 몸에는 근육과 핏줄이 불거져야 멋있는 남성이라는 생각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깔려있다면 ‘굵은 팔목과 터프한 시계’는 당연히 여름 최고의 짝꿍이다.
사회 분위기와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도 다이버 시계를 주력 판매하는 브랜드에 호재다. 액세서리 성격이 짙은 시계는 대개 옷과 짝을 맞춘다. 오류를 무릅쓰고 도식화하면 ‘포멀웨어 드레스 시계×얇고 미니멀한 디자인’, ‘캐주얼웨어 스포츠 시계×시곗줄’까지 금속으로 두른 두툼한 디자인’이 성립한다. 최근 가족과 보내는 주말이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고 있다. 어디든 가야 한다. 회사에서조차 슈트를 권장하지 않는다. 이런 의생활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스포츠 시계의 인기는 나날이 치솟고 있다. 스포츠 시계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다이버 시계다.
실제 최근 하이엔드 스포츠 시계는 없어서 못 판다. 롤렉스 매장에는 스포츠 시계 모델의 씨가 말랐고,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파테크 필리프의 ‘노틸러스’나 오데마르 피게의 ‘로열 오크’는 웃돈을 주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다. 시계 하나 사려면 매장에 매일 들러야 하고, 들러도 구경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어떤 매장들은 전화조차 받지 않는다. 이런 진풍경을 보고 있으면 고급 승용차가 월간 1만대씩 팔린다는 뉴스를 접할 때와 정확히 같은 생각이 든다. 나만 없나?
가성비 좋기로 유명한 띠쏘의 ‘씨스타 1000’. 사진 티쏘 제공
물론 인터넷에 떠도는 ‘시계 계급도’에 등장하는 하이엔드 시계들이 시계 시장의 전부는 아니다. 하이엔드 시계 시장은 고가의 사치품 영역이고, 귀금속 분과다. 그러니 다이버 시계를 알아볼 때 롤렉스와 오메가만 검색할 이유가 없다. 스와치 그룹 소속의 티쏘는 80만원대에 300m나 방수가 되는 스펙 좋은 다이버 시계를 내놓고 있다. 직구에 익숙하다면 만(Maen)의 허드슨(Hudson), 스커르파(Scurfa)의 ‘벨 다이버 1’(Bell Diver 1) 같은 모델을, 일본 브랜드도 괜찮다면 세이코나 시티즌의 다이버 시계를 골라도 좋다. 기계식 시계가 아니라 건전지가 필요한 시계도 괜찮다면 예산을 10만원 이하로 떨어트릴 수도 있다.
휴대전화로 시간을 보면 되지 굳이 시계가 왜 필요 하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소비하는 시대에도 엘피(LP)와 시디(CD)를 찾는 이들이 여전히 있듯, 어떤 선택에는 상황과 사정과 취향이 반영된다. 비즈니스 미팅 때마다 휴대전화를 꺼내서 시간을 확인하는 게 거북하다면, 옷차림에 무언가를 더하고 싶지만, 목걸이나 귀고리는 영 내키지 않는다면, 하물며 여름의 문턱을 넘는 지금이라면 다이버 시계를 꼭 한번 손목에 둘러보길 권한다.
임건(<에스콰이어> 디지털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