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피부가 좋아졌다. 비결이 뭘까? 다른 친구가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 친구 퇴사했잖아.” “노동은 피부 건강의 적.”
직장인이라면 공감하며 씁쓸하게 웃을 이야기다. 그런데 문제는 간단치 않다. 일이 좋냐 나쁘냐 문제로 번지면 곤란하다. 노동하고 싶어도 일이 없는 상태라면 더 나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매 맞기 전에 후일담도 밝히겠다. 한동안 쉬다가 그 친구가 다시 직장을 구하자 우리는 모두 축하를 해줬다, 진심으로.
물론 노동은 힘들다. 지옥 같은 출근, 지옥 같은 일터, 지옥 같은 야유회, 지옥 같은 마감, 악마 같은 상사라는 말이 공연히 나왔을까. 그런데 신기하다. 정작 지옥에 간 사람들은 노동을 하지 않는다. 숱한 지옥 이야기를 보면 그렇다. 어찌 된 영문인지 따져봐야겠다.
지옥에 노동 비슷한 것이 없지는 않다. 생각나는 것이 두어 가지다. 열심히 일하는 지옥의 악마 이야기는 빼자. <팡타그뤼엘>의 지옥도 빼자. 작가 라블레는 이 작품에서 저승을 이승의 반대로 뒤집어 묘사했다. 이승에서 잘나가던 사람은 저승에서 못나게, 고생하던 사람은 잘나게 뒤집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승의 높으신 분들은 저승에 가면 먹고살기 위해 날마다 노동을 해야 한다. 지옥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기보다 이승에 대한 작가의 매콤한 풍자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라블레가 보기에 왕이니 귀족이니 잘나가는 사람들은 살아생전 일 하나 안 하더라는 의미일 터이다.
그리스신화 속 지옥에 나오는 시시포스(시지프스) 이야기는 짚고 넘어가자. 지옥의 다른 수감자들은 영원히 학대만 당하고 있는데, 시시포스는 학대받는 대신 노동 비슷한 무언가를 한다. 비탈로 바위를 굴려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번번이 굴러떨어진다. 영원히 성과가 없다.(적다 보니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우리는 노동을 한다. 돈 때문만은 아니다. 노동에서 우리는 성취감을 얻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에 큰 의미를 뒀다. 노동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고 봤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물론 자주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자기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노동하는 사람에게 보람을 주는 좋은 이야기다. 단지 말이 어려워서 문제다. 좀 쉬운 이야기를 해보자.
옛날 전쟁영화인 <콰이강의 다리>를 봤다. 수용소에서 학대당하던 포로들이 강에 다리를 짓는 노역에 동원된다. 그런데 오랜만에 일다운 일을 해서인지 포로들은 성취감을 느낀다. 장교 한 사람은 이 일에 너무 깊이 빠지는 바람에 포로를 구하러 온 특공대가 다리를 부수려 하자 오히려 이들을 막으려 든다. 다리 짓는 노동도 힘들지만, 그 성과가 날아가는 상황은 더 힘들다는 이야기라고 나는 이해했다. 적어도 그 장교한테는 그랬다. 앨릭 기니스가 연기했다.
그런데 영화 뒷이야기도 있다. <콰이강의 다리>를 찍다가 감독 데이비드 린도 배우 앨릭 기니스도 너무 이 영화에 빠지는 바람에, “내 영화를 망치고 있다”며 서로 증오를 쏟아냈다고 한다. 감독이 배우가 미워 엉엉 울었다는 일화도 있다. 오늘날은 둘 다 최고의 감독과 최고의 배우로 인정받는 사람들이다. 이 영화는 그들 각자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이런 걸 보면 일에 너무 깊이 빠지는 것도 나름의 지옥일지는 모르겠다.
김태권(지옥에 관심 많은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