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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질본’ 정은경이 정도령? 나라 구할까?

등록 2020-06-11 09:16수정 2020-06-11 09:41

김태권의 지옥여행
김태권 그림.
김태권 그림.

옛날에 정도령에 관한 예언이 있었다. 말세에 정씨 성을 가진 구세주가 나타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시때때로 “이 사람이 정도령”이라는 말이 나왔다. 한국전쟁 때 군대를 보낸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정도령이라는 설도 있었다. 정도령의 다른 이름이 ‘진인’(眞人)인데, 영어로 ‘트루 맨’ 아니냐는 이야기. 2020년에는 에스엔에스(SNS)에서 기분 나쁘지 않은 농담이 돈다. ‘질본’의 정은경 본부장이 정도령 아니냐는 것이다. 코로나19로부터 사람들을 살리고 있으니 말이다. 역시 큰 병이 도는 것은 말세의 조건인가 보다.

종말과 지옥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두가지 무서운 이야기다. 나쁜 일의 종합선물세트다. 그런데 둘은 다른 면도 있다. 제일 눈에 띄는 점은 ‘병이 있고 없고’다. 지옥에는 병이 없다.

종말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한묵시록>. 일곱 개의 봉인을 떼는 장면이 있다. 봉인된 두루마리를 하나씩 열어보는데 그때마다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난다. 처음 네개의 봉인을 떼면 네명의 기사가 말을 달리며 나타난다. 흰말을 타고 활을 가진 기사, 붉을 말을 탄 ‘전쟁’, 검은 말을 탄 ‘기근’, 푸르스름한 말을 탄 ‘죽음’이다. 문제는 활을 든 첫 번째 기사다. 맡은 역할이 뭘까? ‘감염병’이라는 해석이 유명하다. 서사시 <일리아스> 첫머리에는 아폴론신이 활을 쏘아 병을 퍼뜨리는 구절이 나온다. <요한묵시록>도 <일리아스>도 그리스어로 된 책이니, 옛날 독자에게는 눈에 익은 대목이었을 터이다.

네명의 기사 중 병과 죽음이 지옥에는 없다. 아니, 죽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 지옥이니, 죽음은 이미 있는 셈이다. 왜 유독 질병이 없을까. 요즘 같은 팬데믹의 시절에 궁금하다. 어쩌면 질병의 고통이 지나치게 현실적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지옥의 고통은 대체로 과장되어 있다. 꼬챙이에 꿰이고 끓는 쇳물을 마시는 지옥의 형벌은 너무 강해서 비현실적이다. 그런데 모두 크건 작건 질병의 고통을 안다. 병은 지옥의 형벌보다 더 와닿는다. 그래서 더 무서울 수도 있다. 어두운 밤길을 무섭다고 하는 이유는 뭘까. 유령이 나올까 두렵다고들 하지만 정작 밤길에 무서운 것은 사람이다. 병이란 컴컴한 밤에 마주치는 낯선 사람만큼이나 현실적인 공포다.

한국의 독특한 종말 신앙 가운데 ‘미륵’ 사상이 있다. 불교에서 믿는 미륵 부처님과는 다르다. 세상을 직접 창조한 신이다. 그런데 치사한 방법으로 도둑맞았다. 지금 세상에 도둑이 들끓고 치사한 일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미륵’은 먼 미래에 빼앗긴 세상을 되찾고 바로잡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정도령이 나타나 미륵 세상을 연다”며 역모를 일으키려던 일도 있었다. 소설로도 유명한 장길산 사건이다. 그런데 과연 언제 돌아올까? 20세기에 신자들 모임에서 채록한 자료가 있다. 거기 이런 ‘예언’이 나온다. 나무마다 꽃이 빛나고 커다란 철새가 하늘을 날 때가 말세라는 것이다. 설교하던 사람이 청중에게 되묻는다. 밖을 보라고. 가로등과 비행기가 말세의 증거 아니냐고. 청중은 맞장구치며 환호한다.

진짜 옛날부터 내려오던 ‘예언’일까? 나중에 덧붙인 건 아닐까. 아무려면 어떠랴. 요즘 같으면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퍼지고 큰 나라들이 휘청거린다는 ‘예언’을 적당히 끼워 넣어도 그럴싸하겠다. “K–종말 신앙”으로 수출해도 먹히지 않을까.

김태권(지옥에 관심 많은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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