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맞는 전체 회식 날이었다. 팀장님이 우리 앞에 놓인 잔을 가리키며 모두 본인 앞으로 건네 달라고 했다. ‘이 구역의 술은 내가 제일 잘 말아’ 하는 자신감 넘치는 손짓이었다. 나는 잔을 건네는 대신 팀장님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술을 잘하지 못해서요, 저는 괜찮습니다.” 동시에 선배들의 눈빛이 일제히 나에게 꽂혔다. 나는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변하는 걸 감지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술을 못 마신다고 할 때마다 ‘잘 마실 거면서 거짓말하지 마, 이러기냐’ 하는 성토가 쏟아진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회유하는 듯한 말이 아니었다. 한 고참 선배가 싸늘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요즘 것들은 이래서 안 돼. 나는 술 잘 마시는 줄 알아? 선배들이 주면 토하고 와서 또 마셨어.” 당황한 나는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팀장님에게 조용히 술잔을 건넸다. 그때부터 내가 마시는 게 술인지 찌개인지,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르게 울렁거려서 힘든 마음을 애써 견뎌야 했다. 참다못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달려나간 나는 건물 옆 어두컴컴한 주차장에서 눈물을 콸콸 쏟았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런 꾸중을 듣나 싶었다. 얼른 눈물을 훔치고 들어가려는데, 또각또각, 아까 혼을 냈던 고참 선배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힘들지?” 그가 말했다. 선배는 다 나를 위해서라고, 지금 제대로 알아야지 앞으로 사회생활이 편해진다고 이야기했다. 선배가 진심으로 해주는 말이라는 건 알았지만, 속에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한 마음이 앞섰다.
술을 강권하는 문화는 많이 사라졌지만, 일터 곳곳에선 여전히 그것과 조응하는 정신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내 방식이 옳다고 하는 ‘꼰대 정신’ 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겪은 꼰대 이야기도 궁금해서 에스엔에스(SNS)에 질문을 올렸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꼰대란 무엇인가요?’ 수십개의 답이 놀랄 만큼 즉각적으로 달렸다. 과거에만 묶여 있는 ‘옛날옛적형’부터 소싯적 불행을 강요하는 ‘너도 당해봐라형’, ‘너도 늙어봐~’라며 강요하는 ‘나이유세형’,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 ‘자아도취형’ 등 아주 다양했다. 사례들을 읽을수록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생각한 꼰대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꼰대가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는 마음에서 말이다.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꼰대 정신은 단연, ‘라떼는 말이야’의 ‘라떼형’이었다. 본인의 경험과 방식이 판단의 절대적인 기준인 사람 말이다. 늘 본인의 경험에 빗대 상대방의 힘듦은 힘든 축에도 못 낀다고 여긴다. “야, 나 때는 얼마나 야근을 많이 했는데, 힘들어도 꾹 참고했어” 등을 자랑하듯 늘어놓다가 “요즘 애들은 참 살기 편해. 할 말도 다 하고 말이야”라고 침을 튀기며 마무리한다. 이들이 자주 쓰는 ‘나 땐 더 심했어’ 뒤엔, 상대가 묻지도 않았는데 시작하는 가르침 시간이 길게 이어진다. ‘요즘 이런 말 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도 이들이 곧잘 쓰는 말이다.
두 번째로 많이 달린 댓글은 변화를 싫어하는 ‘부정형’이다. 상대방이 새로운 제안을 하거나 아이디어를 내면 “굳이 그런 것을 해야 돼?” 하며 부정적인 반응부터 보인다. 시대의 변화를 무시하고 “옛것이 좋은 것이야”라고 한다. 회식이 1차에서 마무리되는 걸 아쉬워하거나, 힘든 일은 꼭 막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성차별적인 발언을 문제의식 없이 내뱉는다는 특징이 있다.
세 번째는 ‘눈치 없음형’이다. 모두가 지루해하는데도 효율성은 어디에다 팔아먹고 회의를 진행하는 부장님, 팀원들이 억지로 맞장구치는 게 빤히 보이는데도 자아도취 되어 얘기하는 상사 등이 해당한다. 후배의 아이디어를 빼앗고 미안해할 줄 모르거나,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얹어서 본인의 공으로 가져가는 게 특징이다.
네 번째는 ‘답정너’ 스타일.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언뜻 그럴싸한 배려로 포장하지만, 결국 꼰대가 되고 마는 유형이다. 이들은 늘 상대의 의향을 먼저 묻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것 좀 해줄 수 있어?”라는 질문은 선택이 아닌 ‘이것 좀 해’라는 명령이다. ‘이럴 거면 왜 물어봤어?’ 하는 허탈감이 든다.
나이 많은 상사, 부장만 꼰대가 되는 걸까? 아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더 큰 발언권을 갖게 되니 상사나 선배가 꼰대로 보일 확률이 높아지는 것일 뿐, 꼰대는 나이와 직급을 가리지 않는다. ‘불합리한 경험은 내 선에서 끊는다’는 독한 각오가 있지 않으면 누구나 ‘아차!’ 하는 순간에 꼰대가 될 수 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진심을 담은 ‘조언’까지 꼰대라고 무작정 매도할 수는 없는 법! 같은 이야기도 누가 하면 멋진 선배의 조언이 되고, 누가 하면 불편한 꼰대의 참견질이 되는데, 꼰대로 비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에 계속)
임현주(MBC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