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에 관한 네 가지 이야기를 해보자.
첫 번째 이야기는 지옥 없는 천국. “난 지옥은 없고 천국만 있다고 생각해.” “어째서?”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 인간이 잘못을 한다고 해서 지옥에 보낼 정도로 신이 쩨쩨하지는 않을 거야.” 옛날 성당 친구가 한 말이다. ‘천국만 믿고 지옥은 안 믿는다니, 뷔페처럼 골라 믿는 게 가능할까’ 싶었지만, 어쨌거나 지옥이 무서운 사람에게는 기쁜 이야기 같았다.
두 번째 이야기는 천국 없는 지옥. 그리스도교 교리에는 원래 천국이 아니라 지옥만 존재했다는 것이다. 교리라는 말만 나와도 화제를 돌리고픈 마음은 나도 왕년에 성당을 다녔기 때문에 잘 알지만, 그래도 재미는 있는 이야기니 조금만 참아 달라.
사람들이 천국에 입장하게 된 계기란 예수의 죽음이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 교리가 그렇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말인즉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하기 전에는 천국이 문을 열지 않았다는 소리 아닌가? 예수 이전의 의인들은 천국에 가지 못했다는 뜻이다. 구약성서에서 칭찬받던 의인이 일반 지옥에 있다면 이상하다.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고민하며 성서를 뒤졌다. 그러다 찾아냈다. 예수 이전에는 착한 사람이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구절을 말이다. ‘아, 그렇다면 그 아브라함의 품이란 곳에 머물다가 천국이 오픈한 다음에 천국에 간 것으로 하면 되겠구나.’ 아귀가 맞는 해석이다. 아무려나 교리상으로는 천국 없이 지옥문만 열렸던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세 번째 이야기는 신기하다. 천국 없는 저승이라는 우울한 상상이, 옛날 옛적 사람들 사이에 의외로 널리 퍼져있었다는 사실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했다.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가장 훌륭한 영웅 중 한명이다. “둘 중 하나를 택하라. 명예롭지만 때 이른 죽음이냐, 아니면 오래 살지만 아무도 안 알아주는 삶이냐.” 양자택일을 해야 했을 때 그는 주저하지 않고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는 죽어서 저승에 간 아킬레우스가 투덜대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더라”는 속내를 저승을 방문한 오디세우스한테 털어놓는다. 호메로스가 노래한 저승은 우울한 장소다. 천국이 따로 없다 보니 영웅도 악당도 뒤섞여 있다. 이런 저승관은 훗날 바뀌었다. 호메로스보다 나중에 태어난 그리스 사람들은 엘리시온이라는 저승의 낙원을 상상해냈다. 아킬레우스 같은 위인이 거기서 행복을 누린다고 믿었다. 그리스 신화에도 날씨 좋은 천국이 도입됐다.
오늘날은 지옥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 유행이다. 옛날 성당 친구가 믿고 싶어 한 것처럼, 지옥 없는 천국이 대세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믿는다”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생각하면 이쪽이 합리적인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글을 마치면 즐거울 텐데, 무서운 네 번째 이야기가 남았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10과 2분의1장으로 쓴 세계 역사>의 마지막 장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지옥 없는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한다. 그곳에서 갖가지 즐거운 일을 시도한다. 여기까진 좋다. 그런데 쾌락은 유한하고 시간은 무한하니 마침내는 영원한 권태를 피할 수 없다. 요컨대 지옥 없는 천국은 천국 없는 지옥과 다르지 않다는 것. 천국이 천국다우려면 지옥이 있어야 하나 보다.
김태권(지옥에 관심 많은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