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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직장에서 누군가 나를 괴롭힌다면?

등록 2020-07-30 10:44수정 2020-07-30 21:08

클립아트코리아.
클립아트코리아.

혹시 당신에게도 이런 사람이 곁에 있는가? 출근 전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하는 사람, 사무실에서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나를 긴장하게 하는 사람. 내 곁엔 그런 사람이 있었다. 몇 년간 직장에서 나를 집요하게 괴롭혔던 사람이. 이미 지나간 일이고 지금의 나는 아무 일 없이 잘살고 있으니, 힘들었던 과거를 원망하거나 탓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다. 다만, 누구에게도 선뜻 도움을 구하기 어려웠고 해결책을 찾기 힘들었던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직장에서 일로든 성희롱으로든 가해자의 괴롭힘에 멍들고 있을 누군가에게 작게나마 힘을 보태고 싶어서 쓰는 이야기이다.

나는 당시 신입사원이었다. 그 사람의 괴롭힘은 다방면으로 이어졌는데, 본인 감정 상태에 따라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은 핑곗거리를 찾아서라도 회의실로 나를 불러 호통을 쳤고, 단체 카톡방에 내 이름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욕설을 쓰기도 했다. 그러다 기분이 괜찮은 날에는 갑자기 “네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며 과한 웃음과 친절을 베풀어 당황하게 했다. 결정적으로는 ‘나쁜 사람으로 비치진 않겠다’는, 본능적인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상대를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도 합리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그치고 달래는 것을 반복하며 상대를 자신의 감정에 종속시켜 눈치 보는 사람으로 만드는 건 전형적인 괴롭힘의 유형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이것은 둘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 명의 가해자는 주변 동료들을 침묵하게 하거나 용기 있는 조력자로 변모시킨다. 물론 대다수는 굳이 중재에 나서지 않는다. 가해자가 ‘강약약강’(강한 이에게 약하게, 약한 이에게 강하게)의 전형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알고도 방관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소극적인 형태로 가해에 동참하는 것일 수 있다. 참고 참다가 우회적으로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대응하거나, 피해자의 문제 제기를 오히려 지적하며 참을 것을 권유하거나, 혹은 알아서 해결하겠지 하고 외면해버리는 경우, 피해자는 더욱 큰 절망감과 고립감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싫으면 더 강하게 말했어야지. 더 적극적으로 항의했어야지. 문자도 친절하게 답했던데?”라는 의심은 또 얼마나 흔한가. 피해자가 처음부터 용기를 내는 건 쉽지 않다. 가해자의 권위와 권력이 강할수록, 회사에서 입김이 셀수록, 피해자는 낙인찍히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커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생계와 커리어가 달린 직장 아닌가. 따라서 피해자인데도 우선은 가장 원만한 방식으로 가해자의 행동을 바꿔보려고 노력한다. 잘 지내보려고 친절하게 대응하고, 상황을 바꾸어보기 위해 에둘러 거절하는 방법을 동원한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마치 앞뒤 말과 행동이 다른, 어떤 의도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들로 바뀌어 나에게 2차 가해가 된다. 그러나 상황은 ‘누군가의 용기’로 변화할 수 있다. 피해자의 용기나, 혹은 피해자 옆에서 목소리를 더해주는 누군가의 용기 말이다.

나에게 가해지던 괴롭힘을 멈추게 한 건, 같은 후배 입장인데도 그에게 나 대신 목소리를 내준 한 선배의 용기였다. 선배는 내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 그 사람에게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때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혼자 끙끙 앓던 후배들이 조금씩 용기를 내 각자 겪은 마음의 상처들을 조금씩 꺼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너도나도 고백에 나섰다. 그 고백은 때론 너무 날카로워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작은 상흔으로 남기도 했다. 흩어져 있던 용기 있는 목소리가 모이기 시작하자 가해자는 놀란 달팽이처럼 움츠러들었다.

회사의 시스템이나 규율을 통해 보호받지 못할 때, 목소리를 모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 명의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를 불러오고, 그렇게 가해자가 피해자를 마음껏 주무르고 괴롭히던 조직의 틈새는 다시 촘촘히 메워지게 된다.

하루하루 바스스 무너지는 중심을 지탱해가며 혼자 힘들게 싸우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그런데 기억하자. 함께 모인 목소리 앞에 가해자는 속수무책으로 약해진다는 것을, 결국 연대가 힘이라는 것을. 우린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이제 용기만 내면 된다. 목소리를 모으자! 우리가 ‘누군가의 용기’가 되자!

임현주(MBC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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