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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열다섯의 여름’ 그 친구가 처음 말을 걸었다

등록 2020-07-30 10:52수정 2020-07-30 13:49

입시 학원이 몰려들며 변한 나의 동네 상계동
패싸움 일삼던 ‘양아치’였던 그 친구
사냥감이었던 나, 사냥꾼이었던 그, 하지만….
지금도 나를 붙잡는 그 친구와의 기억
클립아트코리아.
클립아트코리아.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시 ‘발레리나’로 등단했던 올해 서른한살의 시인 최현우. 20대 때 차곡차곡 모은 아린 이야기로 올해 첫 시집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를 펴낸 그가 앞으로 ESC에 ‘오늘의 날씨’를 소개합니다. 다음은 최 시인이 보내온 연재의 변입니다. <편집자 주>

“어떤 날에는 옷과 꽃이 홀딱 젖도록 소나기를 만났고, 폭염에 지친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을 만났습니다. 눈이 올 줄 알고 잔뜩 여민 옷깃이 무색하도록 햇살이 좋은 날도 있었습니다. 구름의 모양도 매일 달랐다지요. 우리는 한 번도 어제와 같은 하늘을 살아본 적이 없지만, 수많은 어제의 하늘들이 모여서 오늘의 날씨가 될 겁니다.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알게 된 것들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친구가 죽었다.

열다섯의 여름, 죽음이라는 건 한 번도 가까웠던 적이 없었고 구체적으로 사유해본 적도 없었다. 친구라고 불렀으나 그와 나는 친밀한 시간을 공유해본 적이 없다. 수업이 끝난 빈 교실에서 이따금 몇 마디를 주고받거나, 학교 뒷골목 가로등 불빛을 피해 숨어서 담배를 태우던 그와 눈인사를 나누고 지나치는 정도였다. 그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사거리에서 훔친 오토바이로 과속하다가 사고로 죽었다.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의 수군거림을 출석부를 내리쳐 무마하면서 나쁜 짓을 하고 돌아다니면 그렇게 되는 거라고 말했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있었던 그의 여자 친구는 헬멧을 쓰고 있어서 다행히 생명을 건졌으나 몸의 절반을 수술해야만 했다. 다른 중학교의 학생이었던 그 여자 친구의 소식은 한동안 동네 또래들의 입에서 자주 끓었다. 장기입원을 끝내고 이곳을 떠났다는 이야기 이후로는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그의 장례식이 어디서 열리는지, 조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양아치였고, 일진이었다. 그의 죽음이 학교로서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는지 선생들은 말을 아꼈다. 슬퍼하는 아이들도 거의 없었다. 학부모들의 항의 전화가 교무실로 걸려 왔고, 그와 어울려 다니던 아이들은 꽤 오랫동안 학교의 감시를 받았다. 가을이 지나고, 동복을 입는 겨울이 왔고, 이내 모든 날이 다 아무렇게 지나갔다.

내가 살았던 상계동은 그런 곳이었다. 입시 학원들이 몰려오면서 강남의 교육 수준을 따라잡은 강북이 되겠다는 모토가 중계동에 휘몰아쳤다. 고급 아파트와 고층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선 중계동의 비싼 집값을 감당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상계동으로 몰려 왔다. 거주 인구가 늘어난 만큼 학교도 늘어났다. 수업이 끝나면 교문마다 학원에서 운용하는 노란색 15인승 버스들이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늘어섰다. 버스에 탑승하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학교에서조차 따로 어울렸다. 입시 바람이 불기 전부터 이 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오른 임대료와 땅값으로 돈을 벌었다. 뒤늦게 편입한 사람들은 대출을 무리하게 받아서 아파트 전세금과 자식들의 교육비를 마련했다. 중계동과 상계동은 곧잘 ‘입시 공장’이라는 별칭으로 어른들 입에 오르내렸다. 좁은 동네에 너무 많은 사람과 학원, 상권이 집중되다 보니 고작 사차선 도로 하나를 끼고 저쪽과 이쪽의 빈부의 차가 컸다. 저쪽에는 공원이 잘 조성된 아파트와 신축 상가들이 늘어섰고, 이쪽에는 여전히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담벼락에 금이 간 낡은 주택들이 구불구불한 골목을 만들며 돋아나 있었다.

부모들의 욕망은 아이들에게도 배급되었다. 돈이 많은 집의 아이들은 공부를 잘했고 저마다의 학원에서 시험 족보를 받아 예습했다. 그나마 저렴한 보습학원이라도 다닐 형편이 되는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과 우정을 빙자한 시중을 들며 족보를 공유 받았다. 집에 돈이 없거나 공부에 재능이 없던 아이들은 일찌감치 다른 방식으로 세력을 만들었다. 어울려 다니며 나름의 조직을 구축하고, 학원가의 어둑한 골목에서 담배나 술을 먹다가 늦은 시간 학원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아이들을 사냥하듯 돈을 뜯었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훔쳐 타고 각목이나 칼을 들고 싸우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아이들에게는 노스페이스 패딩 점퍼가 계급장이 되었는데, 한 벌에 40만원에서 100만원까지도 하던 그 옷은 빈부의 격차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상징물이었다. 부모로부터 쉽게 선물 받았던 아이들은 뺏기기도 했고, 스스로 상납해서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도 했다. 쉽게 입을 수 없었던 아이들은 부모와 싸웠고 패스트푸드점이나 호프집에서 주민등록증의 숫자를 긁어 나이를 속이며 일해서 돈을 모았다. 순진한 아이들도 부모를 졸라서 패딩을 사 입었는데, 시장에서 팔던 짝퉁인 줄도 모르고 학교에 입고 갔다가 한 학기 내내 놀림감이 되었다. 그런 아이들은 얼마 뒤부터 돈을 뜯는 무리에 합류하거나 따로 무리를 만들기도 했다. 선생들은 아이들이 답습하고 있는 사회의 모형을 통제하기 위해 폭력을 애용했다. 쉽게 때리고 쉽게 맞았다. 우열반이라는 제도가 생기면서 아이들의 사회는 조금 더 명확하게 계급이 분리됐다. 우등반 아이들은 보충수업을 받으며 학부모들이 돌아가면서 사는 햄버거나 피자 따위를 자주 먹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욕망만이 아니라 절망까지도, 질투와 증오와 슬픔까지도 물려받고 자랐다. 어른들은 스스로 우리가 만든 세상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늘 말했지만, 그들이 고치려던 것은 그들의 세상이 아니라 아이들의 세상이었다. 아이들은 선택할 수 없는 곳에서 태어나 잘못된 선택을 하면 혼이 났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희망을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고 복제하며 어른이 만든 설계도를 따랐다.

나는 그 동네의 모든 것이 싫고 슬펐다.

엠피(MP)3 플레이어가 등장하고 조금 지나서, 내게도 여섯곡 정도가 저장되는 엠피3 플레이어가 생겼다. 쉬는 시간마다 몰래 음악을 듣던 내게 그 친구가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때는 겨울방학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아마도 내 것을 뺏으려고 왔겠지만, 내가 듣던 음악을 듣더니 자신의 플레이어를 주면서 같은 노래를 담아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는 종종 내게 와서 말을 걸었다. 그가 어울리던 무리는 철저하게 사냥꾼들이었고, 사냥감과 어울리는 일을 하면 응징을 일삼는 쪽이었다. 조직을 결속하고 위압감을 조성하는 아주 효과적인 룰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사냥감 쪽이었으므로, 그는 내가 혼자 남아 청소를 할 때만 다가왔다. 담배를 가르쳐주겠다며 저녁 어두운 골목으로 나를 데려가서는 자기는 사실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종종 짧게 만나 어설프게 담배를 태우며 노래 얘기를 했다. 그 짧은 대화를 마치면 우리는 가야 할 곳이 달랐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사냥꾼, 나는 사냥감. 위계가 있었다.

어느 날 다른 학교와 패싸움이 크게 붙었다. 그 시기 학교의 열등반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다 같이 어울렸는데, 동네 어른들에게는 불량한 애들의 표본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중랑천 근처 공터는 전쟁터가 될 예정이었다. 열외는 배신이었고 겁이 나거나 불안한 아이들조차도 함부로 도망갈 수 없었다. 나 역시 불길한 생각과 도망칠 궁리를 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싸우러 가지 않으면 남은 학교생활을 반 아이들과 싸워야 하니까. 혼자서 주먹을 만지작거리며 초조하게 모든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릴 때쯤, 그가 왔다.

넌 하지 마.

매섭게 말하는 그의 눈빛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겁이 났던 누군가가 몰래 선생에게 패싸움 소식을 알렸고, 선생은 아이들이 함부로 나가지 못하게 교실을 지켰다. 다른 학교의 적대 세력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던 아이들은 속으로 안도하며 선생의 말을 따랐다. 그러나 자존심이 걸려 있던 무리는 선생들이 방심한 틈을 타 전쟁터로 나갔다. 그는 거기에 있었다. 그 싸움은 뉴스에도 짧게 실릴 만큼 위험했다. 싸움에 참여했던 애들은 병원에 오래 있거나 정학이나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의 모습도 한동안 볼 수 없었고, 그것이 그와 나눈 마지막 말이었다. 정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무단결석과 조퇴를 반복했다. 선생도 아이들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집이 이사해야 하는 시기에 나는 독립했다. 혼자서도 생활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갖추려고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단지 그 동네를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 아직 상계동에 있는 본가를 들를 때면 그 사거리를 지난다. 사거리를 건널 때마다, 핏자국을 보기도 한다. 보인다고, 생각이 든다. 그는 그때 왜 나를 막았을까. 언변이 어눌하고 투박했던 그가 했던 말은 여전히 나를 막는다. 삐끗하고 밟거나 넘어질 수 있었던 삶의 모든 교차로에서 그가 서 있었다. 넌, 하지 마. 그때마다 나는 발과 말을 멈췄다. 나도 모르게 실행할 수 있었던 불의와 폭력의 순간에서, 그가 보인다. 그가 서 있다.

그가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판잣집이 몰려 있던 구역에 집이 있었고, 할머니를 곧잘 때렸고, 패싸움 이후 집을 나와서 어떤 형들과 숙소 생활을 하며 자퇴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도. 열다섯의 여름, 그날 교실 창밖 하늘에는 커다란 뚜껑처럼 생긴 두껍고 어두운 구름이 덮여 있었다. 나는 그에게 친구였을까.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그의 전부다.

최현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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