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제일교회의 뉴스를 보며 나는 이 문장이 떠올랐다. “불현듯 흥겨운 선율의 손풍금 소리가 거리에서 들려왔다. 그것이 마치 출정하기 전에 울리는 나팔 소리인 양 사임은 의연히 서 있었다. 그는 어디에선가 샘솟는 신비한 용기로 충만했다. 그 명랑한 풍금 소리는 지저분한 거리의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활력과 소박함, 그리고 용기로 가득했다. 손풍금 소리에 맞춰 매일 전쟁터에 나가는 거리의 평범하고도 친근한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체스터턴의 소설 <목요일이었던 남자>에 나온다. 설명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체스터턴은 영국의 작가다. 이런저런 글을 많이 썼다는데, 추리소설 <브라운 신부 시리즈>와 <목요일이었던 남자>가 많이 읽힌다.(나도 그것만 읽어봤다.) 보르헤스는 추리소설에 대한 강연에서 “체스터턴이 에드거 앨런 포보다 낫다”고 말한 적 있다. 유명한 이야기다. 왜 유명하냐 하면, 한국에서 체스터턴을 소개할 때마다 이 구절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체스터턴은 추리소설의 원조인 포를 능가하는, 무려 보르헤스가 인정하는 작가라는 것이다.
직접 읽어보면 글쎄, 무어라 말해야 할지. “보르헤스는 미스터리 문학을 별로 안 좋아했나 보다”라는 것이 내 솔직한 생각이다. 재밌긴 재밌다. 찾아서 읽게 된다. 그런데 추리소설로서는 별로다. 플롯은 수습이 안 되고 트릭은 썰렁하다. 그래도 깜짝 놀랄 정도로 재밌는 장면이 가끔 있다.(보르헤스도 강연에서 그 점에 주목한다. 체스터턴의 소설이 전부 재밌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체스터턴이 파고드는 주제도 흥미롭다.
적지 않은 범죄소설이 그렇듯, 체스터턴의 작품도 선과 악이라는 문제를 다룬다. 그런데 독특하다. 선한 탐정이 악한 범죄자를 잡는 뻔한 이야기가 아니다. 악당과 싸우다가 스스로도 타락한, 악하고 폼 나는 탐정의 이야기도 아니다. 탐정 브라운 신부는 성직자다. 선한 사람이지만 세상의 악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시리즈의 처음 두어 작품에서 악당은 범죄자 플랑보다. 그런데 얼마 후부터 플랑보는 브라운 신부와 같은 편이 된다. 셜록 홈스와 왓슨 박사처럼 브라운 신부와 플랑보는 함께 다닌다. 체스터턴이 그려낸 세계에서 선과 악은 뒤엉켜 있다. 자기가 믿는 대로의 선과 악을 남에게도 강요하려는 사람, 똑똑한 형사니 점잖은 성직자니 위대한 장군이니 하는 잘난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곤 한다.
장편소설 <목요일이었던 남자>에는 두 맞수가 등장한다. 예술가인 그레고리는 이 세계를 파괴하고 싶어 한다. 주인공 사임은 그에 맞서 세계를 지키려 한다. 주인공은 이 따위 시시한 세계를 왜 지키나? “지저분한 거리의 가난한 사람들”이 “매일 전쟁터에 나가” 더럽고 치사한 일을 겪는 공간인데 말이다. 체스터턴은 선악이 불분명한 세상에서 이 지긋지긋한 일상의 평범함이야말로 드물게 선한 것이라고 봤다. 거리의 생활소음에 불과한 손풍금 소리가 영웅의 나팔 소리로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일상을 위협하는 바람에 내가 이 구절을 떠올렸을까? 다른 이유가 있다. 1908년에 발표된 이 소설에서 주인공 사임은 무신론자에 맞서는 기독교 전사라고 스스로를 생각한다. 그때는 저 혼자 잘난 사람의 독단에 맞서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지키기 위해 종교를 가진 사람이 나서서 싸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김태권(지옥에 관심 많은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