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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폭염 점령에 나선 어글리 슬리퍼~~!

등록 2020-08-21 15:10수정 2020-08-21 15:17

유행은 자본주의의 변덕스러운 앞잡이?
어쨌든 올여름 투박한 플립플롭 대유행
못생겨서 재밌고, 그래서 더 신고 싶은 슬리퍼
남성 패션계 ‘백종원식 만능소스’ 아이템
뜨거운 여름엔 플립플롭을 찾는 이가 많다. 특히 해변 패션 아이템으로 인기다. 게티이미지뱅크
뜨거운 여름엔 플립플롭을 찾는 이가 많다. 특히 해변 패션 아이템으로 인기다. 게티이미지뱅크

여름은 패션의 암흑기다. 멋을 부리고 싶어도 몸에 걸칠 수 있는 옷의 가짓수가 적으니 스타일링할 여지도 거의 없다. 기껏해야 티셔츠 대신 셔츠의 소매를 걷어 입거나, 반바지 대신 리넨 팬츠를 입는 정도다. 그마저도 너무 과하면 “그렇게 입고 안 더워?”라는 질문인지 핀잔인지 모를 말을 듣기 일쑤다. 소비자 입장에서 살 게 많지 않으니 당연히 판매도 위축된다. 게다가 겨울 코트 한 벌을 파는 것과 티셔츠 한장을 팔았을 때의 수익은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가죽 제품은 여름에 팔리지 않으니 7~8월에는 아예 공장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를 몇 년 전 가죽 공장장에게 들은 적이 있다. 사는 쪽이나 파는 쪽이나 영 쉽지 않은 계절이 여름이다.

검은색 우포스 슬리퍼. 프레이트 제공
검은색 우포스 슬리퍼. 프레이트 제공

필자는 종종 유행이 강력한 자장을 지닌 에너지로 느껴질 때가 있다.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홀려서 종국에는 소비하게 하는 힘. 그렇지 않고서야 어제까지 관심도 없던 물건을, 심지어 잘 쓸지도 모르는 제품을, 왜 지갑을 털어 구매할까? 정말 유행이 아니라면 그 물건을 그 금액에 구입했을까? 100만원에 달하는 운동화를 서유럽, 아시아, 미주에서 동시에 앞다퉈 구매하는 전 지구적인 현상은 또 어떻게 설명하고? 그러니 유행을 자본주의의 변덕스러운 앞잡이라고 설명하면 너무 과한 걸까?

영악한 유행이 여름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비싼 물건을 못 파는 계절이라면, 저렴한 물건을 널리 많이 사게 하면 된다. 올여름은 슬리퍼, 그중에서도 우포스(Oofos)라는 신발 브랜드의 ‘플립플롭’(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 사이를 한 가닥 줄로 연결한 슬리퍼)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필자가 일하는 사무실에도 4명이나 우포스를 신고 있고, 지하철역 출구에 가면 이 슬리퍼를 신은 젊은 남녀가 무시로 쏟아져 나온다.

플립플롭의 대명사 하바이아나스. 하바이아나스 인스타그램
플립플롭의 대명사 하바이아나스. 하바이아나스 인스타그램

실제로 우포스의 누리집에 들어가면 인기를 짐작게 하는 두 개의 팝업창이 뜬다. 하나는 주문 폭주로 인한 배송 지연 안내창이다. 심지어 그 창에는 ‘고객당 한 주문에 5켤레로 구매를 제한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럼 5켤레 넘게 주문한 이들도 있다는 뜻일까? 나머지 창에는 모조품과 유사품에 주의하라는 안내 문구가 적혀 있다. ‘최근 아마존을 통해 우포스 제품과 포장까지 똑같은 카피 제품이 판매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인기의 척도라는 카피 상품이 시중에 나돌고 있으니 유명세에 대해선 의심할 바 없겠다.

사무실에 우포스를 신고 있는 4명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샀어요?” 답변은 모두 같았다. “편해서요.” ‘그래 보이긴 하는데 5만5000원짜리 슬리퍼를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샀다고요?’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실례인 거 같아 참았다. 그렇다면 사용자가 아닌 공급자는 우포스의 인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때마침 지인 중 우포스 슬리퍼를 취급하는 편집매장의 대표가 있어 물었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어글리 스니커즈의 인기가 이렇게 이어지는 거죠. 딱 봐도 못생겼잖아요. 요즘 젊은 세대는 못생긴 물건을 입고 걸치는 걸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는 말을 이었다. “파는 입장에서 좋죠. 가져다 놓으면 온라인에서 밤새 다 팔리거든요. 수익률이 엄청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잘 팔려서 재고 부담 없으니 만족해요. 게다가 이 슬리퍼를 사기 위해 매장을 찾는 이들도 꽤 많아요. 이른바 ‘미끼 상품’ 역할을 톡톡히 해요.” 그래서 그에게 다시 물었다. 이 유행이 끝날 것 같으냐고. “우포스는 유통 구조가 괜찮아서 아직 가격 방어가 돼요. 근데 만약 포털 쇼핑 채널에 최저가로 이 슬리퍼가 뜨고, 그래서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최저가에 팔려고, 사려고 한다면 끝이라고 봐야죠. 수익이 더 이상 안 나오는데 뭐 하러 팔겠어요.”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패션업계 종사자에게서 여러 번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유행하기 시작한 물건은 곧 유행이 끝날 거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유행이 안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 번 터지고 사라지는 것보다는 조금씩 팔아 오래가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올해 20~30대가 많이 찾은 슬리퍼 브랜드 우포스. 신발 판매 플랫폼 폴더 누리집 갈무리
올해 20~30대가 많이 찾은 슬리퍼 브랜드 우포스. 신발 판매 플랫폼 폴더 누리집 갈무리

생각해보면 우리는 누군가와 비슷해지려는 욕구와 타인과 다르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존재한다. 거칠게 일반화하면 본인이 생각하는 롤 모델(예를 들면 아이돌 김아무개)의 운동화를 보고 그와 동일시하고 싶은 욕구 혹은 그만큼 감각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개인이 늘어 운동화를 구입할 때 유행이 시작되고, 그 운동화가 너무 흔해졌거나 출시한 지 오래돼 본인의 취향과 안목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판단하는(필자는 “개나 소나 다 신는 운동화는 싫다”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 개인이 많아질 때 유행은 사그라든다. 수많은 브랜드에서 연예인과 인플루언서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것도 이런 이유다.

성공한 메이커와 브랜드는 사람들의 심리와 유행의 메커니즘을 알고 이용한다. 그래서 그들은 수량 제한이라는 카드를 쓴다. 대표적인 것이 스트리트웨어 브랜드 슈프림이 사용하는 ‘드롭’(Drop)이다. 이는 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에 신상품을 파는 방식을 말한다. 제한된 상품을 한시적으로 판매하니 사람들이 매장 앞에 줄을 선다. 전 세계 매장은 고작 12개이고, 백화점 같은 곳에 도매로 물건을 넘기는 일도 없다. 같은 제품을 동시간에 대량으로 풀지 않으니 유행의 필요조건이 만족되지 않는다.

한편 ‘없어서 못 팔아요’의 원조는 롤렉스다. 그들은 고급 시계 제작자란 명성을 얻은 후 꾸준히 판매 수량을 조절해왔다. 공급이 희소성을 낳고, 희소성이 럭셔리의 핵심축이라는 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아서다. 그 결과 중고 시장에서는 ‘롤렉스는 환금성이 좋다’는 말이 불문율처럼 받아들여진다. 다시 말해 롤렉스를 사려는 사람들은 늘 존재한다는 뜻이다.

필자도 현명한 소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필요한 재화를 적당한 값에 사서 오랫동안 만족하면서 사용하는 것이라면 그 물건은 유행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유행은 수요공급 그래프에서 수요의 수치를 지나치게 부풀리는 경향이 있으니까.

슈프림 티셔츠. 슈프림 페이스북 화면 갈무리
슈프림 티셔츠. 슈프림 페이스북 화면 갈무리

검은색 플립플롭은 대부분의 옷차림에 잘 어울린다. 바버샵 제공
검은색 플립플롭은 대부분의 옷차림에 잘 어울린다. 바버샵 제공

그럼 다시 ‘무엇을 사야 오랫동안 만족스러울까’에 대한 답은 유행의 가장 주요한 요소인 ‘한시적인 시간’과는 멀어지는 것이다. 이런 물건들을 우리는 ‘클래식 물건’, ‘베이식 아이템’이라고 부른다. 회색 양복, 짙은 갈색 구두,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하늘색 옥스퍼드 셔츠, 적당히 물 빠진 청바지, 회색 스웨트셔츠(흔히 ‘맨투맨’이라고 부르는 상의) 등이 여기에 속한다. 슬리퍼로 말할 거 같으면 검은색 ‘플립플롭’이 여기에 속한다.

눈치 빠른 이라면 이 원고에 슬리퍼와 플립플롭이라는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한 걸 알았을 거다. 먼저 두 단어를 구분하는 건 슬리퍼가 플립플롭보다 더 넓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슬리퍼는 발등만 싸고 나머지는 노출된 신발을 총칭하는 반면, 플립플롭은 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 사이에 끈이 하나 더 있는 슬리퍼를 특정한다. 플립플롭은 우리가 흔히 ‘쪼리’라고 부르는 일본 전통 신발 ‘조리’에서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몇 년 전 국내에서 유행한 이탈리아 슈트. 피티워모 제공
몇 년 전 국내에서 유행한 이탈리아 슈트. 피티워모 제공

역사보다 중요한 것은 활용성이다. 대부분 이 슬리퍼를 시원해서 신는다고 생각하지만, 필자는 어떤 옷에도 잘 어울리기에 자주 활용한다. 남성복 스타일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바지와 신발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그러려면 두 물건 간의 색과 비율이 잘 맞아야 한다. 예를 들어 양복을 입을 때 가장 적절한 바지 길이는 바짓단 뒤쪽이 구두 굽 위에 닿고, 바짓단 앞쪽은 구두 위에서 약간의 주름이 지는 정도다. 만약 바지가 3~4번씩 접힌다면 이상적인 바지 길이라고 할 수 없다. 반대로 바지가 너무 짧고 통이 좁으면 조카 바지를 뺏어 입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플립플롭을 활용하면 바지와 신발 간의 조화에 덜 신경 써도 된다. 바지통이 넓으면 넓은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수더분하게 받아준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만 아니라면 ‘백종원식 만능소스’처럼 어떤 차림에도 감칠맛을 더해줄 거다.

임건(<에스콰이어> 디지털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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