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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기후변화, 오만한 인간이 받는 벌인가

등록 2020-09-03 09:22수정 2020-09-03 10:11

김태권의 지옥여행
김태권 그림
김태권 그림

요 몇 년 기후변화로 장마가 짧아졌다. 올해는 기후변화로 장마가 길다. 비, 비, 비. 이럴 땐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 말이다. 나는 ‘물지옥’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비가 와서 아프다. 혹시나 싶어 찾았더니 용어가 있다. 어려운 말로 ‘메테오로퍼시’(meteoropathy), 그리스말 ‘메테오론’(높은 곳의 일, 즉 날씨)과 ‘파토스’(고통)를 이어붙인 단어다. 일본에서는 ‘기쇼뵤’, 즉 기상병이라 부른다는데 ‘병’이라고 할 것까지야. 우리말로는 ‘기상통’이나 ‘날씨통’ 정도가 적절하지 싶다.

과학으로 입증된 개념은 아니라고 한다. 비 오는 날이면 기압이 낮아 몸이 아픈 것이라고 우리는 흔히 말한다. 그런데 미국 과학자 데니스 드리스콜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고층 빌딩에 올라가도 기압이 떨어지지만 그 때문에 관절염이 악화된다는 사람 봤냐”며 꼬집었다. 습도가 높으면 불쾌하고 볕을 못 쬐면 우울감이 심한 것은 사실. 그래도 지옥의 고통까지는 아니다. 지옥은 영영 태양이 뜨지 않는 곳이라고 하니까.

물을 이용하는 지옥을 생각한다. 불교의 확탕지옥은 팔팔 끓는 물에 죄인을 데쳐낸다. 단테의 <신곡>에는 얼음지옥이 나온다. 그런데 끓는 물이건 얼음이건, 고통을 주는 것은 물이 아니라 온도다. 확탕지옥은 버전에 따라 끓는 기름이나 끓는 쇳물을 쓰기도 한다. 녹는점과 끓는점에 따른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물지옥이라 부르기는 애매하다.

물이 중요한 지옥은 없을까. 생각났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탄탈로스. 그는 물 한가운데 서 있다. 목까지 물이 찰랑댄다. 그런데 목이 마르다.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숙이면 물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머리 옆에는 과일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데 그는 배가 고프다. 입을 대려고 하면 과일이 달아난다. 잔인한 지옥으로 유명하다. 다만 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물이 부족해서 받는 고통이긴 하다. 탄탈로스라면 장마철을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 탄탈로스가 왜 벌을 받는지가 불확실하다. “죄 많은 아트레우스 가문 사람이라 그렇다”는 설명을 어느 책에서 봤는데 글쎄다. 이 가문은 워낙 엉망이라(가족끼리 죽고 죽이는 것은 디폴트) 탄탈로스만 심한 벌을 받는대도 이상하다. 아폴로도로스의 <신화집>을 보니 두 가지 설명이 있다. “어떤 사람 말로는 신들의 비의를 인간에게 누설했기 때문이라 하고, 어떤 사람 말로는 암브로시아를 인간에게 나눠주려 했기 때문이라 한다.” 암브로시아는 신들이 먹고 마시는 음식인데, 이걸 먹으면 신처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탄탈로스는 신의 자리를 넘본, 분수를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잔인한 벌을 받는지도 알 것 같다. 인간이 신과 맞먹으려고 하는 오만함을, 그리스말로는 ‘히브리스’(Hybris)라고 불렀다. 그리스 사람들은 히브리스를 제일 큰 죄로 쳤다. 신화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가 제 뜻을 따르라고 바다를 채찍질한 일이 있었다. 히브리스의 역사적인 사례다. 바다나 강 같은 자연도 신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내 마음에 이런 무거운 질문이 떠올랐다. “오늘날의 환경파괴 역시 히브리스일까? 그렇다면 기후변화는 오만한 인간이 받는 벌일까?”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을 해보려던 나의 시도는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비 때문에 울적하다.

김태권(지옥에 관심 많은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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