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부터 걷고 싶은 길이 있었다. 전에 살던 아파트 뒷길이다. 가로수 울창한 인도가 약 1㎞ 뻗어 있다. 인적도, 차량도 드문 평범한 길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단 하나. 아파트 16층 베란다에서 자주 내려다봤던 길이었다. 최근 그 길을 걷고 깨달았다. ‘동네에서도 여행지 찾아온 기분이 드는구나.’ 접촉 없는 여행(언택트 여행)이 화두다. 타인과의 대면은 물론 손잡이 같은 공용 시설물도 조심스러울 때, ‘우리 동네’를 여행하는 건 어떨까. 근거리 당일치기 여행이 코로나19 시대의 트렌드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누구나 쉽게 바로 지금 당장 떠날 수 있는 여행이 ‘우리 동네 골목 투어’다.
파란 점이 깜박인다. 스마트폰 지도 앱이 가리킨 현재 위치는 서울 용산구 청파동. 정확한 주소와 위치는 의미가 없다. 길이 복잡한 동네다. 일부러 직선보다 곡선이 많은 동네를 골랐다. 실핏줄처럼 이어진 골목 구석구석을 누빌 참이었다. 정해진 방향이나 계획은 없다. 지난 8일 오후, 회사(한겨레신문사) 주변 동네를 혼자 걸었다. 맛집·카페 골목이 아닌, 평범한 주택가다. ‘이게 과연 여행이 될까?’ 주택가 아스팔트 길을 5분간 걷고 나서 든 생각이다.
일찍이 동네 골목 여행을 즐겨 온 이들이 있다. 2012년께부터 서울 청파동 일대 골목 여행을 즐긴 블로거 ‘오삼팔’(별명)은 “(동네 골목 여행은) 퍼즐을 맞추거나 미로를 걷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며 “낯선 길을 걷다가 모퉁이를 돌 때 ‘짠’ 하고 아는 길이나 가게가 나오면 재밌다”고 말했다. 전 세계 47개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와 서울 중랑구 상봉동에서 ‘여행 책방’을 운영하는 바람길 박수현(49) 대표는 다음 달 하순 ‘골목길 사진 여행 수업’을 준비 중이다. 그는 “동네 길도 낯설면 또 하나의 여행지가 된다”며 “옛날 모습대로 남아있는 길을 언덕에서 내려다볼 때 유독 예쁘다”고 말했다.
청파동 일대 골목에서 만난 고양이. 김선식 기자
생경한 길을 목적지 없이 배회하는 건 낯선 일이다. 여행지가 아닌 주택 골목이라면 더 그렇다. 나도 모르게 쑥스럽고 움츠러들었다. 담벼락 꼭대기에서 인도로 내려온 길고양이처럼 사뿐사뿐 발을 내디뎠다. 발길 닿는 대로 간다지만, 어쨌든 갈 길을 선택해야 한다. 공덕동과 청파동 1가 경계 부근 갈림길에선 더 운치 있어 보이는 골목으로, 청파동 1가로 들어가 비슷해 보이는 두 개의 길에선 좀 더 좁은 골목으로, 빼곡한 주택에 둘러싸여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을 땐 괜히 계단 있는 쪽으로 갔다.
그렇게 되는 대로 걷다 보면 조심스러운 의문과 기대가 뒤범벅된다. ‘여기 길 맞아?’ ‘왠지 저 길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러다 두 차례 다세대 연립주택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막다른 골목을 되돌아 나왔다. 막막한 마음에 앱 ‘램블러’를 켰다. 지도에 이동 경로를 표시해주는 앱이다. 청파동 1가 북서부를 뱅뱅 돌며 걸어온 길을 확인하곤 그 반대쪽으로 지도를 보며 걸었다. 이번엔 남동쪽이다. 헛된 일이었다. 지도를 보느라 풍경을 보지 못했다. 스마트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마스크 안에서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긴장감은 조금 누그러졌다. 재활용 쓰레기봉투를 뒤적이던 길고양이도 사람이 지나가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길가에 눈에 띄는 새까만 열매 사진을 찍었다. 앱 ‘모야모’로 이름을 확인했다. 이용자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식물 이름을 알려주는 앱이다. ‘미국자리공’. 미국에서 왔고 독성이 있으며 생명력 강한 식물. 식물 설명 중 꽃말이 눈에 띈다. ‘잴 수 없는 사랑’. 멧비둘기 한 마리가 담벼락 위로 날아든다. 나뭇가지 하나 물고 서서 두리번거린다. 그도 갈 길을 찾고 있는 게 틀림없다.
효창공원 맨드라미 화분에 모인 참새들. 김선식 기자
골목 여행가들은 길에서 무엇을 볼까. 블로거 오삼팔은 “골목에선 주택 형태, 창문, 정원, 지붕 사이로 보이는 하늘, 계절별 식물 변화, 고양이, 강아지 등에 눈길이 간다”며 “오래된 일본식 주택부터 건축 연대별로 다양한 주택 형태를 구경하다 보면 시간 여행하는 기분도 든다”고 한다. 바람길 박수현 대표는 “지저분한 골목에서도 빨간 벽돌 주변에 자라는 이끼와 풀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동네 거리가 미술관처럼 보일 때가 있다. 전봇대에 매어 놓은 안장 없는 자전거는 ‘설치미술’이다. ‘사람 하나 맞을 수 없는 매인 신세’. 거대한 학교 담장에 담쟁이덩굴은 지붕 모양을 그리며 자란다. 그 ‘지붕’ 아래로 지나는 사람이 그림을 완성한다. 서울 청파초등학교는 오랫동안 청파동에서 한자리를 지켜 왔다. 1943년 경성 서공덕국민학교 이름으로 설립돼 1996년 지금 이름으로 개명했다. 한쪽 울타리를 따라 정겨운 벽화가 이어진다. 그중 강아지 두 마리, 사람 한 명, 강아지 화장실을 그린 벽화에 눈이 간다. 괜히 그림에 뜻을 더해 본다. ‘화장실 급해 달려갔더니 강아지 화장실이더라.’ 허무맹랑하기만 할 것 같던 동네 여행도 명랑한 구석이 있다.
동네여행도 그럴싸한 순간이 온다. 뜻밖에 전망 좋은 장소를 발견할 때가 그렇다. 서울 청파초등학교 벽화 거리에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좁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20여칸 이어진 돌계단을 내려갔다.
서울 청파동 1가 골목길을 걷다가 발견한 전망 좋은 곳. 김선식 기자
서울 용산구 청파동 2가 골목에서 만난 고양이. 김선식 기자
마치 여행지 전망대 마냥 철제 난간이 보였다. 탁 트인 공간이라 안전장치(난간)를 설치한 것이다. 바로 아래 기와지붕 집들이, 중간 즈음 서울역을 출발한 무궁화호가, 멀리 남산 아랫동네가, 하늘 아래 남산타워가 한눈에 들어왔다. 평일 오후 인적 드문 길에 홀로 한참 서 있었다. 무궁화호 세대를 보내고서야 발길을 돌렸다. ‘언젠가 다시 와야지’ 점 찍었다.
청파동은 예로부터 푸른 야산 언덕이 많아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숲 대신 골목과 주택뿐이지만, 과거를 모두 잃은 건 아니다. 골목길에 어울리지 않을 만치 우람한 나무, 수풀 우거진 담벼락, 현관 앞 수북한 화분들이 정겹다.
골목을 빠져나와 숲으로 향했다. 청파동과 효창동에 걸쳐 있는 효창공원(사적 제330호)이다. 백범 김구 등 독립 열사들이 묻힌 이곳은 도심 숲 구실을 한다.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산책로가 짜임새 있다. 한 바퀴(약 1.8㎞) 도는 둘레길 말고도 여러 샛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 저마다 풍경이 다른 청파동 골목길을 닮았다. 울퉁불퉁한 돌바닥 길과 나무 데크길, 흙길이 깔렸다. 공원 중앙 화분들 앞에서 꽃구경한다. ‘촛불 맨드라미’ 화분에 참새 떼가 몰려들었다. 일제히 부리로 꽃을 한참 뜯는다. 씨앗을 빼 먹으려는 걸까. 참새들의 회식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 산책길. 김선식 기자
광역·시·군·구 지자체들은 관할 공원, 산 정보 등을 제공하는 누리집을 운영하기도 한다. 서울시의 경우, ‘서울의 산과 공원’ 누리집(parks.seoul.go.kr)에서 자치구별 주변 공원을 찾아볼 수 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누리집(heritage.go.kr)에선 전국 자치구별 문화재 현황을 검색할 수 있다.
동네 여행은 가볍게 시작하길 권한다. <나는 골목에 탐닉한다> 저자 권영성(57)씨는 2003년부터 17년간 국내 골목 여행을 하며 블로그에 글을 올려왔다. 그는 “처음부터 낯선 동네를 가면 스스로 사람들 시선을 의식해 편하게 걷기 어렵다”며 “자기 동네에서 시작해 옆 동네, 옛날 살던 동네 등으로 점점 넓혀가길 권한다”고 말했다. 이어 “꽃, 계절별 풍경 사진, 고궁, 미술관 등 자신의 관심 분야에 따라 걷는 영역을 넓혀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삼팔도 “자신의 체력에 맞게 취향을 따라가면 된다”며 “아는 곳도 천천히 걸으면 느낌이 전혀 다를 때가 많아서 동네 뒷길에서도 새로움과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8일 서울 한겨레신문사 주변 공덕동, 청파동 1, 2가, 효창동 일대 동네를 여행한 경로가 표시된 램블러 앱 화면. 램블러 앱 화면 갈무리
출발점으로 돌아와 ‘램블러’ 앱을 클릭했다. 실핏줄 같은 골목 지도에 파란 줄이 구불구불 그어져 있었다. 이날 이동 경로였다. 선은 기묘한 무늬를 그렸다. 두시간여 짧은 동네 여행이 남긴 여운도 그랬다. 이상하게 다시 가보고 싶어졌다.
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