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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타오르는 지구의 초상, 사라지는 오지

등록 2020-10-09 10:07수정 2020-10-09 10:37

아시아 최대 담수 습지 다나우 센타룸
이반족 오지 마을은 어느새 변해버렸고
지구와 인간, 아쉬운 쪽은 인간일 뿐
다나우 센타룸 습지의 미로 같은 물길. 사진 정희섭 제공
다나우 센타룸 습지의 미로 같은 물길. 사진 정희섭 제공

지구의 미래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세계적 석학의 유언이라면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으리라. 스티븐 호킹 박사는 죽기 전 “인류가 생존하려면, 100년 이내 지구를 떠나 고향으로 삼을 다른 행성을 찾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세계도 여기서 출발한다. 2014년 개봉한 <인터스텔라>는 식물이 죽어가는 지구가 배경이다. 먼지폭풍이 불고, 숨쉬기도 힘든 지구에서 인류에게 남은 희망은 지구를 떠나는 것이다. 과학자 머피는 다른 차원에 갇혀 있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인류를 구원할 중력방정식을 풀고, 인류는 지구를 떠난다.

그런데 머피가 인류를 구원하지 못하고, 대신 중력방정식을 풀다가 뜻하지 않게 인버전(시간 역행) 기계를 발명하고 인류를 말살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만든 ‘다중우주’를 발견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래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숲을 태우고, 야생동물 서식지를 파괴하고, 바다를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지구온난화를 자초한 주범’인 선조를 없애는 방법밖엔 남지 않았다면 말이다.

밀렵꾼이 놓은 덫에 걸려 발목을 잃은 야생 호랑이. 사진 정희섭 제공
밀렵꾼이 놓은 덫에 걸려 발목을 잃은 야생 호랑이. 사진 정희섭 제공

2020년 8월 개봉한 <테넷>은 ‘해수면이 올라가고 강이 말라버린’ 지구에 사는 후손이 생존을 위해 인버전 기계로 21세기 인류를 공격하는 복수극이다. 황당한 공상이지만, 어쩌면 크리스토퍼 놀런이 미래와 소통하는 ‘사토르 마방진’(가로로도 세로로도 똑같이 읽히는 단어 집합)이고 <테넷>은 미래 인류가 선조들에게 보낸 ‘경고장’인지도 모르겠다.

서두가 길었다. 현재 지구는 불타고 있고, 동식물은 멸종하고 있으며, 필자 역시 지구를 떠돌며 그 장면을 목격하곤 했다. 그때마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이 떠올랐다. 나룻배가 다니고, 고기잡이나 하고, 감자나 매던 고향을 10년 만에 찾았지만 산업화와 관광지 개발로 변해버린 모습 앞에서 망연자실하던 정씨.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나를 열대우림 속 오지마을로 이끌었던 김도훈 피디의 심정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지금껏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여러 대륙의 오지를 가봤지만, 다나우 센타룸에서 만난 이반족 마을은 가장 순수한 마을이었어. 하루만 묵고 빠져나온 게 너무 아쉬워. 순박한 사람들이 기다란 롱하우스에서 공동생활을 해. 같이 농사짓고, 화살로 사냥하고…. 다시 가봤으면 좋겠어.”

이반족이 사는 롱하우스. 이반족은 공동체 생활을 한다. 사진 정희섭 제공
이반족이 사는 롱하우스. 이반족은 공동체 생활을 한다. 사진 정희섭 제공

다나우 센타룸은 보르네오섬에 위치한 범람원으로, 지구에서 생물 다양성이 가장 풍부한 호수를 품은 아시아 최대 담수 습지다. 240여종의 물고기, 237종의 조류, 143종의 포유류, 26종의 파충류, 그리고 원주민이 더불어 사는 곳으로 드래건피시, 스톰황새, 코주부원숭이 등 멸종위기 동물에겐 얼마 남지 않은 안식처다. 정희섭·김도훈 피디와 남미 아마존, 아프리카 콩고분지에 이어 세계 3대 열대우림으로 꼽히는 동남아 열대우림으로 향했다.

지구는 불타고 있었다. 우린 열대우림을 보러 갔다가 끝이 보이지 않는 팜나무 농장이 그 자리를 차지한 모습을 곳곳에서 목격했다. 정글(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말로, ‘경작되지 않은 땅’이란 뜻)이 사라지고 있었다. 어떤 이는 팜나무도 나무인데 무슨 상관이랴 할지 모른다. 다국적 기업은 팜오일 생산을 위한 농장을 만들기 위해 숲을 불태운다. 온실가스 피해는 말할 것 없고, 동물은 서식지를 잃고, 다른 식물이 자랄 수 없는 땅이 된다.

팜나무 농장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고 멸종위기에 처한 오랑우탄. 사진 정희섭 제공
팜나무 농장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고 멸종위기에 처한 오랑우탄. 사진 정희섭 제공

‘숲의 사람’ 오랑우탄은 살 터전을 잃어 점점 개체 수가 줄었고, 먹이를 찾아 호랑이가 민가까지 내려왔다. 밀렵꾼이 놓은 쇠덫에 발목을 잃은 호랑이를 목격하기도 했다. 호랑이는 스스로 발목을 끊고 달아났다가 구조된 상태였다. 다리 하나를 쓸 수 없는 네발짐승이 먹이를 구할 길은 없기에.

다나우 센타룸 국립공원으로 가기 위해 사라왁공항에서 푸투시바우행 비행기로 갈아탔다. 이반족 대부분은 대도시 사라왁에 거주한다. 센타룸에 사는 이반족은 카푸아스강 어귀에 살던 조상의 터전을 떠나지 않고 남은 이들이다. 김 피디에 따르면 이들은 열대우림 가운데 논밭을 일구고,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고 했다.

열대우림에서 사는 이반족이 주식으로 먹는 카사바. 사진 정희섭 제공
열대우림에서 사는 이반족이 주식으로 먹는 카사바. 사진 정희섭 제공

센타룸 호수 선착장에 도착해 엔진을 단 카약형 보트 두대를 빌려 타고 이반족이 사는 오지마을을 찾아 나섰다. 지도는 없었다. 있다고 한들 찾을 수 있는 장소도 아니었다. 인공위성을 기반으로 한 지도를 확대해도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초록’은 정글이고, 수백마리 지렁이를 뿌려놓은 듯 구불구불한 ‘나선’은 수풀 사이로 난 물길이었다. 지도를 대신할 방법은 김 피디의 ‘기억’과 그의 설명을 듣고 핸들을 잡은 보트 운전사의 ‘촉’.

다나우 센타룸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을 오르기로 했다. 그곳에서라면 대략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발고도 몇백미터에 불과했지만 정글을 뚫고 산을 오르는 건 고된 일이었다. 마침내 다다른 정상에서 내려다본 정글은 초록빛 피부를 가진 생명체 같았고, 호수는 그 생명체의 심장처럼 보였다.

다나우 센타룸의 전경을 볼 수 있는 산의 정상에서 필자. 사진 정희섭 제공
다나우 센타룸의 전경을 볼 수 있는 산의 정상에서 필자. 사진 정희섭 제공

방향을 가늠하고 산에서 내려와 수상마을을 지났다. 수상주유소에서 부식거리도 사고 기름도 채웠다. 해가 뉘엿이 저물긴 했지만 운전사가 마을 위치를 대충 알겠으니 찾는 데 어렵진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우린 몰랐다. 캄캄한 밤이 올 때까지 열대우림을 헤맬 줄은.

작은 배 위에서는 높은 수풀 너머를 볼 수 없다. 물길의 끝은 또 다른 갈래로 나뉘고, 마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수풀 사이 물길로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수차례.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일몰 전에 마을을 찾아야 할 텐데…. 드론으로 영상을 촬영해서 마을을 찾는 건 어떨까, 하는 구상도 했다. 그러나 좁은 배 위에서 드론을 날린다 해도 돌아온 드론을 되잡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사람이 다치거나, 드론이 물에 빠지거나.

열대우림에서 사는 이반족이 주식으로 먹는 카사바. 사진 정희섭 제공
열대우림에서 사는 이반족이 주식으로 먹는 카사바. 사진 정희섭 제공

밤이 왔다. 보트의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건 수풀 사이 물길뿐. 지나온 길이 어딘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연중 300일 이상 비가 내리는 열대우림에 구름이 밤하늘을 가리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배 안에 빗물이 고이자 현지인 운전사도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호수 중앙으로 빠져나가자. 이러다 다 죽겠어.” 정 피디가 소리쳤다. 그러나 캄캄한 미로 같은 습지에서 호수 중앙으로 빠져나갈 물길을 찾을 수 없었다. 다급해진 운전사가 속력을 높이며 구불거리는 물길을 헤집고 이리저리 내달렸다. 잠깐이었는데, 김 피디가 탄 배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불러도 응답이 없었다.

“저기야, 저기! 찾았어!”

김 피디를 태운 배가 나타난 건 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간신히 뭍에 닿았다. 근데 이상했다. 오는 내내 김 피디로부터 이반족이 사는 오지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외딴 마을, 문신을 한 사람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배 댈 곳조차 없어 뻘처럼 발이 빠지는 이탄층을 지나 겨우 닿았다는 곳.

이반족의 특징인 문신. 사진 정희섭 제공
이반족의 특징인 문신. 사진 정희섭 제공

관광지처럼 수변 데크가 있었다. 배를 정박하고 짐을 내리자 도와줄 사람을 불러오겠다며 김 피디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장대비를 피해 짐을 처마가 있는 정자로 옮기는 사이, 김 피디가 나타났다. 헤드랜턴을 이마에 매단 원주민들이 짐을 하나둘 어깨에 메더니 옮기기 시작했다.

정 피디가 김 피디에게 물었다. “근데 여기가 그 마을 맞아?” “응…. 맞긴 맞아. 예전에 만났던 족장도 만났어. 분명 같은 마을인데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오토바이도 여러 대 서 있고, 전깃불도 들어오고, 도로도 보이는 것 같고….”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한 채 허공을 쳐다보았다. 마치 <삼포 가는 길>에서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린 정씨처럼.

보르네오섬에 있는 아시아 최대 담수 습지 다나우 센타룸의 풍경. 사진 정희섭 제공
보르네오섬에 있는 아시아 최대 담수 습지 다나우 센타룸의 풍경. 사진 정희섭 제공

<인터스텔라>에서 물리학자 브랜드 박사는 주인공에게 말한다. “자네 딸 세대가 지구의 마지막 세대가 될 거야.” 2000년대로 접어든 후 과학자들은 “지금 같은 속도로 지구온난화가 계속되면 21세기 후반엔 북극에서 얼음을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후반은커녕 2018년에 이르자 2만년 동안 얼어 있던 ‘최후의 빙하’가 무너졌다. 노르웨이 연구진은 2030년 여름엔 북극 얼음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전망했다. 현재 지구온난화가 인간 탓이라고 여기는 과학자는 95%다. 한국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세계 7위다. 이산화탄소 배출 증가량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이반족이 사는 롱하우스. 이반족은 공동체 생활을 한다. 사진 정희섭 제공
이반족이 사는 롱하우스. 이반족은 공동체 생활을 한다. 사진 정희섭 제공

타오르는 숲, 멸종하는 동식물, 해수면 온도 상승으로 잦아진 태풍, 야생동물에서 인간으로 전이되는 바이러스 등 지구환경이 붕괴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임계점을 지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일찍이 티라노사우루스, 매머드, 도도새 등 46억년 지구 역사에서 사라져 간 동식물은 무수히 많다.

지구는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이 지구를 필요로 할 뿐.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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