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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지옥엔 내 자리 있을까?

등록 2020-10-21 19:24수정 2020-10-21 19:34

김태권 그림
김태권 그림

주차장이 지옥을 연상시킬 때가 있다. <한겨레> 2000년 1월12일치에는 ‘주차지옥’이라는 말을 쓴 칼럼이 실렸다. “주차 때문에 살인사건까지 발생하는 현실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바람이다.” 글 말미의 해맑은 문장은 2020년에 다시 보니 민망하다. “자동차가 신분을 상징한다는 고정관념도 20세기와 함께 흘려보내고 새 천년에는 소형차를 이용하는 선진의식이 필요하다.”

얼마 전 차를 얻어 탔다. 주차를 못 해서였다. 지하 1층에 들어갔는데 ‘만차’였다. 빙빙 돌다 지하 2층에 가도 자리가 없었다. 지하 3층에 내려가면서 나는 지하로, 지하로 가라앉는 무서운 상상을 했다. 빈자리 없는 지하주차장과 지옥은 비슷한 점이 둘 있다. 하나는 가도 가도 내 자리가 없다는 절망이다. 또 하나는 좁은 지하 공간에 갇혀 영영 지상에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 불안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 두 가지 두려움은 서로 다르다. 내 자리가 없다면 나는 정착하지 못하고 오래오래 떠돌 것이다. 위치가 쉬지 않고 달라진다. 반대로 내가 영영 갇힌다면 나는 한 장소에 묶여 꼼짝하지 못할 것이다. 영원한 권태와 불안이 내 몫이다.

어느 쪽이 더 무서운가? 고전 속 지옥에는 두 가지 공포가 다 나온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저승을 여행한다. 세상을 떠난 친구가 저승을 떠돌아다니는 광경도, 어떤 죄인이 한곳에 묶여 ‘맞춤형 고문’을 받는 장면도 본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는 다양한 지옥이 등장한다. 어떤 지옥은 죄인이 쉴 틈도 없이 떠밀려 다니고, 어떤 지옥은 옴짝달싹할 수 없이 묶여있다.

미묘한 차이는 있다. 단테의 <신곡>을 꼼꼼히 보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지옥은 그래도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이 간다. 사랑 때문에 죄를 지은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커플이 이곳에 있다. 무거운 죄를 지으면 몸의 절반이 얼음 지옥에 갇히거나, 숫제 몸통이 악마의 입에 물려 꼼짝을 하지 못한다. <오디세이아>에서도 붙박이로 잡혀있는 이들은 중죄인이다.

아무려나 지옥은 현실을 본뜬 것이다. 나이 든 세대의 현실은 지옥과 비슷하다.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바뀌는데, 변화에 적응하기는 힘들고 바뀐 세상에 자기가 할 일은 없다는 서러움을 느낀다. 자기 자리가 없다는 두려움이다. 한편 보던 것만 보고 만나던 사람만 만나며 좁은 세상에 갇히는 느낌도 든다.

젊은 세대도 현실이 가혹하기는 마찬가지다. 내 집 마련도 어렵고 취직도 어렵고 직장에 오래 붙어있기도 어렵다. 문자 그대로 내 ‘자리’가 없다. 한편 매미의 애벌레인 굼벵이를 한자로 지잠(地蠶)이라고 한다. ‘땅속 누에’라는 뜻이다. 매미가 되기 전까지 지잠은 5년이건 7년이건 땅 밑을 긴다. ‘이러다 매미도 되지 못한 채 땅에 갇히는 건 아닐까.’ 이런 우울한 생각도 들 것이다. 굼벵이가 생각을 한다면 말이다.

나는 중년이다. 지옥과 닮은 이 세상에서 애매한 위치다. 젊은 세대 눈에는 그저 기득권을 가진 사람일 테다. 몇 주건 붙박여 지하주차장에서 일하며 등록금을 버는 젊은 사람에게, 차에 탄 채 지하주차장을 스쳐 가며 우아하게 호메로스니 단테니 고전 나부랭이를 떠올리는 나는 어떻게 보일까. 젊은 사람의 고통을 이해한다며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 따위 값싼 위로는 하지 않는 쪽이, 내가 지켜야 할 최소의 예의일지도 모르겠다.

김태권(지옥에 관심 많은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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