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셰이의 도시는 가변적이고 펑키한 공간 활용을 보여준다. 사진 DTP Companies 제공
미국에 있는 아내가 카톡 문자를 보내왔다. 온라인 쇼핑몰 자포스의 전 시이오(CEO) 토니 셰이의 부고 기사였다. 내가 얼마나 그의 ‘광팬’인지 알기에 놀라서 보낸 것이다. 불과 마흔여섯. 너무 이른 죽음 아닌가. 허탈함과 상실감에 잠시 멍해졌다. 그날 하루, 셰이의 사진을 노트북 모니터에 띄워놓고, 초로 불을 밝히고, 음악과 음식 없이 조용한 하루를 보냈다. 그를 보내는 나만의 작은 추도식이었다.
그의 책을 접한 건, 10여년 전이다. 일과 사람에 지치고, 맞벌이 육아에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던 때다. 좋아하는 등산을 다닐 여력은 물론, 친구들과 잠시 어울릴 짬도 내기 힘들었다. 유일한 낙은 출퇴근하면서 버스와 지하철에서 읽는 책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마치 동네 복사집에서 제본한 듯 아무 장식이 없는 그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흥분했던지. 봐야 할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쉬워 매일 조금씩 아껴가며 읽었다.
내가 친구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학교에 다니며 읽었던 제인 제이콥스(미국의 언론인이자 도시계획가)나 크리스토퍼 알렉산더(건축가), 안드레스 두아니(미국의 건축가이자 도시설계가)의 책은 언제나 위로를 주는 좋은 벗들이었지만, 토니 셰이의 책은 여기에 더해 나와 또래라는 점이 사로잡았다.
대만계 2세로서 그도 치열한 입시를 거친 전형적인 아시안 가정의 아이였다. 대학에 가서 가장 좋았던 점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티브이(TV)를 맘껏 볼 수 있다는 자유였다고 한다. 그는 수업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고도 시험을 잘 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동급생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각자 자신이 가장 깊이 있게 이해한 단락의 핵심을 요약한 노트를 만들게 했다. 동급생들이 그 대가로 받는 건, 그렇게 모인 합본을 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방대한 수업 내용 전체를 개인이 다 정리하긴 어렵지만, 한 챕터 정도쯤이야 학생들에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그는 수업에 출석하지 않고, 성적은 물론 용돈도 벌 수 있었다. 커뮤니티 경제다.
토니 셰이의 공간 철한은 이종적 용도 간의 충돌적 접합을 추구함으로써 단순하게 정의하기 힘든 복합성을 내포한다. 사진 DTP Companies 제공
그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자포스의 신입사원은 일주일 정도 일을 하면 회사로부터 현금 1000달러(약 110만원) 지급 제안을 받는다. 제안을 받아들이면 회사를 떠나야 한다. 대다수 자포스 직원들이 하는 일은 콜센터나 물류센터 업무로 비교적 저임금 노동이기 때문에 1000달러는 큰 액수였다. 치열한 경쟁을 거쳐 들어오긴 했지만, 막상 일을 해 보니 회사가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1000달러는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접고 결심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시 구직 활동을 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지만, 1000달러는 당분간 버틸 수 있는 기반이 된다. 회사는 조직의 철학과 근무 방식에 깊이 동의하는 사람들만 자연스럽게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자본주의의 효율성을 결합한 아이디어다. 아마존의 최고경영자 제프 베이조스는 자포스를 인수한 후, 유사한 방식을 자신의 회사에 도입했다고 한다.
그는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천재다. 방구석에 앉아 허접쓰레기 같은 논문이나 찍어내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산자이 마담과 동업해 창업한 인터넷 광고회사 링크익스체인지를 마이크로소프트에 2억6000만달러로 매각할 때 그의 나이는 고작 스물다섯 살. 10년 후, 자포스를 세계 최고의 온라인 신발 판매 플랫폼으로 성장시킨 그는 12억달러에 아마존과 합병하고도 최고경영자의 지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운 것은 대단한 성과 때문이 아니다. 언제나 고정관념과 판을 뒤집는 그의 혁신과 사고방식이 잠시나마 고루해져 가는 내 두뇌에 휴식을 준다. 매일 식욕과 욕망에 끌려다니는 범인의 일상적 관점에서 셰이처럼 무언가 진심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을 보면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그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우리 시대의 스승이자 영웅 같은 친구이었다.
서론이 길었지만, 이제 내가 광팬인 이유를 말해야겠다. 그는 신념에 따라 살았던 이다. 토니 셰이는 사재를 쏟아부어 황폐해진 라스베이거스 구도심을 재생하는 다운타운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하나씩 실천에 옮겼다. 그의 전략은 세 가지 점에서 혁명적이다.
첫째, 구글을 포함해 기존 대기업이 반복해왔던 캠퍼스형 사옥 관념을 과감히 버렸다. 집값이 비싸 대개의 노동자가 거주하는 데 난관이었던 실리콘밸리를 떠나 본사를 라스베이거스로 옮겼다. 우리에겐 도박도시로 알려졌지만, 라스베이거스는 주거비가 적게 들뿐더러, 각종 문화적 혜택이 집중된 곳이며, 미국에서도 가장 자유분방한 도시이기도 하다. 그는 땅값이 싼 외곽 대신 비어있는 구 시청 건물을 임대했다. 고급 호텔 대부분이 스트립 지역으로 이동한 후, 시청 주변 지역은 침체에 빠졌다. 그는 그 지역 건물들을 매입하거나 정비해 자포스 직원과 협력업체 종사자들을 위한 ‘동네’를 만들었다. 동네란 단순히 주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다닐 학교와 좋은 식당이 있어야 하고, 빨래방과 도서관이 갖추어져야 한다. 대규모 구내식당도 만들지 않았다. 자칫 동네 상권을 죽이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신 지역 가게들을 활성화해 마치 도시 자체가 직원 식당인 것처럼 바꾼 것이다. 직원들은 장시간 출퇴근으로 인한 피로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회사는 대규모 주차장을 짓지 않아도 된다. 각종 시설은 실시간 앱을 통해서 상황을 알 수 있었기에 세탁소나 식당에서 줄 설 필요도 없고, 공유 교통수단을 통해 자가용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도 줄일 수 있었다.
라스베가스 특유의 장난스럽고 괴상한 B급 정서를 보여주고 있는 컨테이너파크. 사진 DTP Companies 제공
둘째, 그는 기존 도시의 분절된 공간 프로그램을 통합했다. 라스베이거스의 컨테이너 파크가 대표적이다. 공원이나 오픈 스페이스는 녹지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탈피했다. 컨테이너 파크는 각종 가게와 교육의 기회, 놀이터와 융합되어 설계되었다. 부모들이 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살펴볼 수 있다. 상점에 들락거리는 사람들 덕에 별도의 경비 인력을 둘 필요가 없다. 계절 장식이나 주변 청소는 가게 주인들이 알아서 신경을 쓴다. 공원에 입주한 스타트업 기업에게도 이런 환경은 무척 이상적이다.
셋째, 가변적 건축이다. 토니 셰이는 언제나 휴먼스케일(인간의 몸 크기를 기준으로 정한 공간이나 척도)을 추구했다. 20세기 모더니즘의 가장 큰 폐해는 인간의 척도에 맞지 않는 건축 환경을 만듦으로써 사람이 집과 도시, 자신의 환경에 대한 제어 능력을 상실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단순히 초고층 빌딩 같은 형태와 규모의 문제만이 아니다. 철근 콘크리트 같은 소재의 측면에서도 모더니즘은 휴먼스케일과 거리가 멀다. 전문가, 대규모 자금 투입 없이는 마음대로 수정이 불가능하다. 사람이 집을 자신에 맞추는 게 아니라, 집에 맞춰 살 수밖에 없다.
토니 셰이는 직원들과 똑같은 크기의 큐비클 책상에서 일했고, 연봉 3만6000달러(한화 약 4000만원)를 받으면서, 미국 캐러밴 브랜드 에어스트림의 트레일러 하우스와 덱 로드에서 생활했다. 소유를 줄이고, 고정적이지 않은, 만만하고 가벼운 삶을 추구했다. 행복은 자신의 만족 추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주변에 행복을 배달하게 될 때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거라고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책 제목도 <딜리버링 해피니스>다. 토니 셰이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최이규(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