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세단 EQS. 사진 메르세데스 벤츠 제공
2020년은 가혹한 한해였다. 전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19로 인해 하늘길이 막히고 공공장소에선 사랑하는 사람의 민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금기시됐다. 밤 9시가 되면 화려한 네온사인을 자랑하던 서울의 밤거리는 정적만이 남고,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명동 상점에는 임대 현수막만 쓸쓸하게 바람에 나부꼈다. 그래서 사람들은 2021년이 2020년과는 다른 모습이기를 기대한다. 내 바람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자동차 전문기자인 내가 2021년을 기다리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2021년은 자동차 시장에서 중요한 변혁기다. 그동안 내연기관차를 생산하는 전통적인 자동차 제조사는 전기차 제작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이유는 단순하다. 자동차 제조사들의 중장기 전략이나 기술 개발의 방향은 미국이나 중국, 유럽연합 같은 거대 시장의 정책이 결정하는데, 굳이 전기차가 아니더라도 내연기관과 배터리를 함께 사용하는 하이브리드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카로도 충분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1년부터는 상황이 달라진다. 변신의 모멘텀을 잡아야 할 상황이다.
포르쉐 전기차 타이칸 제작 공장. 사진 포르쉐 제공
유럽연합은 2021년부터 한해 판매할 모든 차의 탄소배출량을 일괄 규제하기로 결정했다. 탄소 배출량이 평균 95g/㎞를 넘은 차에 대해 1g당 95유로(약 13만원)씩 판매 대수만큼 벌금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징벌적 벌금이다. 게다가 전기차 구매자에게는 면세 혜택이 제공된다.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은 각종 화석연료의 보조금을 없애고, 전기차를 사면 추가 혜택을 약속했다.(다만 혜택은 미국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허용) 장기적으로 전기차가 미국에서 해마다 수백만대 판매되도록 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한 것이다. 미국 내에서 판매하는 연간 1700만대 가운데 300만대를 전기차로 채우는 게 그의 목표다. 중국의 경우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제 전기차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고, 올해 거의 모든 자동차 브랜드가 전기차 출시 계획을 세웠다. 2021년을 전기차 대중화의 원년으로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전기차 SUV ID.4. 사진 폴크스바겐 제공
전기차 출시에 가장 열을 올리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내연기관차를 주도적으로 생산해 온 독일 자동차 브랜드다. 폭스바겐은 올해 전기차 SUV ID.4를 출시한다. ID.4는 폭스바겐 전기차 전용 플랫폼인 MEB를 기반으로 전기모터와 77kWh짜리 리튬이온 배터리가 들어간다. 1회 완충 시 주행가능거리 520㎞(WLTP·중·소형차 배출가스 측정방법 기준)다. 짧은 오버행(차축과 차단과의 거리)과 긴 휠베이스(앞바퀴 중심과 뒷바퀴 중심 사이의 거리)로 공간 활용도를 높였으며 대시보드와 센터콘솔을 분리해 수납공간을 넉넉하게 마련했다. 눈길을 끈 건, 증강현실 헤드업 디스플레이다. 각종 안내 표시를 실제 외부환경과 결합해 표시해주는 기술이다. 경쟁차인 테슬라 모델 Y보다 주행가능거리는 짧지만, 가격 경쟁력과 품질에서 우위에 있다는 평가다.
베엠베(BMW)는 전기차 에스유브이(SUV·스포츠실용차)인 iX를 올해 하반기에 내놓는다. 전기차 시대가 오면 공기를 빨아들이던 라디에이터 그릴을 어떻게 처리할지 의문이었는데, 베엠베는 디자인과 아이덴티티를 고려해 오히려 키웠다. 대시보드 위에는 간결하고 거대한 디스플레이가 설치되었는데, 12.3인치 계기반과 14.9인치 인포테인먼트 디스플레이로 나뉜다. 차체 배터리 용량은 100kWh로, 가득 충전했을 때 주행가능거리는 600㎞(WLTP 기준)이다. 더불어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 가속까지 5초면 충분할 만큼 힘도 넉넉하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플래그십 전기차 세단 EQS를 준비한다. 자신들이 가장 잘 만드는 최고급 세단을 전기차로 선보이겠다는 심산이다. 실내 모습이나 파워트레인(자동차에서 동력을 전달하는 부분)과 관련된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럭셔리한 실내가 될 것이라고 메르세데스 벤츠는 밝혔다. 소형 전기차 세단인 EQA도 올해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EQA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두 개의 전기모터를 얹어 최고출력 272마력를 낼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 외에도 포드는 머스탱 마하-E, 렉서스는 UX 300e, 아우디는 E-트론 GT를 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다. 머스탱 마하-E는 머스탱이란 이름을 쓰지만 외관은 기존 머스탱과 다른 에스유브이다. 대신 강력한 성능으로 이름값을 했다. 가장 강력한 버전인 GT는 3개의 전기모터로 최고출력 466마력을 뿜어낸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97㎞, 가속 시간은 3초로 예상된다. UX 300e는 렉서스의 첫 전기차다. 다른 프리미엄 브랜드에 견줘 다소 늦은 편이지만 하이브리드 모델에서 얻은 기술과 노하우를 전기차에 녹였다고 한다. GT는 96kWh 용량의 배터리, 시스템 출력 590마력의 듀얼 모터 조합으로 이뤄진 고성능 전기차다. 고성능 전기차답게 2단 변속기가 들어가는데,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3.5초면 가속이 가능하며 시속 200㎞까지는 약 12초가 걸린다.
전기차하면 테슬라를 빼놓을 수 없겠지만 이젠 상황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기존의 자동차 제조사들이 막강한 자금과 생산 능력으로 전기차를 만들면 판이 뒤집힐 수 있다는 이야기다. 폭스바겐이나 토요타의 경우 1년에 1000만대씩 생산하던 브랜드이기에 물량 공세로 대응하면 테슬라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테슬라의 2020년 전기차 생산량은 49만9550대) 게다가 브랜드 초기부터 지적받은 조립 완성도 문제는 여전히 테슬라의 발목을 잡고 있다.
현대차그룹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중 하나가 E-GMP다. 현대차그룹이 처음 선보이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으로 모듈형이기 때문에 전기차의 크기와 종류에 상관없이 개발이 자유로워 세단, 크로스오버 차량(CUV), 에스유브이부터 고성능 모델까지 다양한 전기차를 만들 수 있다. 잘 만든 플랫폼 하나로 전기차 라인업을 단숨에 늘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를 방증하듯 현대차그룹은 2025년까지 전기차 23종 중 11종을 E-GMP 플랫폼으로 제작할 계획이다. 비록 내연기관차 시장에선 후발주자였지만 전기차 분야에선 주도권을 잡기 위해 속도를 내는 현대차그룹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현재 전기차 전용 플랫폼이 있는 자동차 제조사는 지엠(BEV3), 폭스바겐(MEB), 메르세데스 벤츠(EVA2) 등으로 손에 꼽을 정도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E-GMP를 기반으로 전기차 3종을 출시할 예정인데, 현대차의 아이오닉 5, 기아차의 CV(프로젝트명), 제네시스의 JW(프로젝트명)가 그 주인공들이다. 아이오닉 5는 2019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데뷔한 콘셉트카 45를 토대로 만든다. 새로운 전동화 구동 시스템과 배터리 전기를 외부로 꺼내 쓸 수 있는 멀티 급속충전 시스템(400V·800V) 등이 적용된다. 최근 현대차그룹 연구개발본부장 알베르트 비어만 사장은 한 인터뷰를 통해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 가속까지 3.5초, 최고 시속 260㎞에 달하는 고출력 전기차를 개발 중이라고 언급했다.
1885년 카를 벤츠가 처음 내연기관차를 특허 등록한 이래 전기차 산업의 헤게모니는 줄곧 내연기관차에 있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헤게모니는 이동했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내연기관차 중심의 기존 자동차산업 구조를 전기차 중심으로 전환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는 모양새다. 전기차는 그들에게 브랜드의 50년, 100년을 책임질 미래 먹거리 산업이다. 시장조사업체 에스엔이(SNE)리서치는 2021년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을 약 687만8000대로 예상했는데, 이는 2020년의 2배가 넘는 수치다. 게다가 글로벌 전기차 시장이 2021년부터 2030년까지 연평균 21%씩 성장해, 2030년에는 판매량이 4000만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과연 어느 브랜드가 2021년이라는 첫 단추를 잘 끼워 전기차 시장의 주도권을 잡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선관(<모터트렌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