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확산으로 지금은 자제하지만 시음은 술 상점의 특징이다. 장소는 ‘술술상점’. 박미향 기자
온갖 것이 있는 상점은 놀이터다. 둘러보는 것만도 재미가 있다. 하물며 일반 상점도 이러할진대 술 상점은 어떨까? 지난해 질세라 술 상점이 여기저기서 생겼다. 우리 전통주만 파는 상점이다. 20~30대가 전통주 양조에 푹 빠지면서 패키지부터 맛까지, 우리 술은 그야말로 천지개벽했다. 별만큼 다양해진 우리 술을 찾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지난 15일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술술상점’을 찾은 권호현(37)씨. “시음 가능해요?”라고 묻자 술 해설사를 자처하는 막걸리학교 문선희(44) 사무국장이 증류주 ‘추사40’의 음용법을 알려준다. “따스한 물을 섞어 마시면 향을 3배 즐길 수 있다.” 최근 전통주에 호감이 생겼다는 권씨는 이날 휴대가 간편한 한국 와인 100㎖ 3종을 구매했다. 곧이어 애주가를 자처하는 20대 여성 3명도 이곳을 찾아 “패키지 예쁘다. 화장품 케이스 같다”며 반하고 돌아갔다. 한국에 주짓수를 알린 이로 유명한 연세대 존 플랭클(54) 교수도 이날 얼굴을 내밀었다. “집에서 술을 빚는다”는 그도 한참을 둘러보고 갔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인 지금은 자제하는 분위기지만, 시음은 술 상점들의 특징이다. 시음으로 자신의 술 취향을 알면 낭비 없는 주문이 가능하다. 설 명절을 코앞에 둔 지금, 서울 지역 곳곳에 생긴 여러 술 상점에서 전통주를 골라보면 어떨까.
‘술술상점'’ 찾은 20대 여성들. 박미향 기자
탁주, 한국 와인, 증류주 등 200종이 넘는 우리 술을 배치한
‘술술상점’(중구 필동 퇴계로30길 10). 술 상점계의 대표 선수다. 지난해 3월 중구문화재단의 ‘중구청년공동문화창업사업’ 지원 대상에 선정되어 7월께 문 연 술술상점의 대표는 33살의 청년 최효진씨. 전통주에 관심이 많던 그는 “전통주 살 데가 없다”며 아쉬워하는 친구들의 불평에 창업을 결심했다. 마케팅과 홍보에 도움을 주는 막걸리학교의 문선희 사무국장의 권유도 마중물이 됐다.
서울 충무로에 있는 술 상점 '술술상점'. 박미향 기자
휴대가 간편한 100㎖ 우리 술도 있고, 선물용 도자기에 든 고급 술도 있다. 최근 출시된 증류주 ‘추사 백’(25도), ‘꽃잠’ 같은 ‘신상’도 준비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무형문화재 청명주 명인’인 중원당 김영섭 대표, 꽃집 ‘메이플라워’와 술술상점이 협업해 만든 ‘미희 생일 버전’ 같은 특별한 술도 있다. 문 국장은 “새 술에 대한 거부감을 시음을 통해 해소한다”며 “온라인 판매와는 또 다른 장점”이라고 말한다. 취향을 찾아주는 게 술 상점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우리술한잔 바앤바틀’(종로구 관철동 청계천로 57)은 우리 술 칵테일도 맛볼 수 있는 상점이다. 바텐더 이영진(33)씨가 상주하면서 마술을 부린다. 김은경(45) 대표는 “충남 홍성의 양조장 ‘별빛드리운못’이 생산하는 ‘해와 달’이나 ‘3·1 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술’ 같은 흔하게 볼 수 없는 술이 많다”고 말한다. 매달 자문위원들이 지역 특성 술을 골라 큐레이션하기 때문이다. 지역 양조장 투어의 결과물을 책자 <우리술한잔>에 담기도 한다. 한때 국가 정책 홍보 전문 대행사를 운영했던 대표의 이력이 녹아들어 있다. 김 대표는 “농산물 소비에 유용한 매개체가 우리 술”이라며 “농산물을 엮어 양조장 홍보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 술 55종이 손님을 기다린다.
지역 전통주 소개 책자도 제작하는 ‘우리술한잔 바앤바틀’. 박미향 기자
세련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우리술 바틀샵 현지날씨’. 박미향 기자
코로나19 확산만 아니었다면 20~30대로 가득했을 서울 문래동 철공소 골목. 그곳에 둥지 튼
‘우리술 바틀샵 현지날씨’(영등포구 도림로439)는 한종진(32)·김현지(28) 부부가 운영하는 술 상점이다. 이 둘은 막걸리학교에서 만났다. 그야말로 우리 술이 맺어준 인연이다. 한씨는 “잘 팔리는 술보다 유명하지 않은 술 위주로 판다”고 말한다. 32㎡(9.68평) 작은 공간엔 눈요기할 만한 술 관련 책과 포스터가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1월, 처음 문 열었을 때만 해도 하루 진열대를 세번이나 채워 넣을 정도로 영업이 잘되었지만, 지금은 매출이 3분의 1로 토막 났다”며 한씨는 안타까워했다. 5만원 이상 구입하면 숙취해소제를 덤으로 준다. 오는 4~5월께 양조장 ‘날씨양조’도 열 계획이다.
이 밖에 음식 콘텐츠 플랫폼이자 간편식 판매업체인 쿠캣의 오프라인 매장인 쿠캣마켓 코엑스몰에도 전통주 섹션이 있다. 경기 수원시 영통구에 자리 잡은
‘당신의술’도 전통주 상점이다. 지난해 12월께 지하철 옥수역 인근에 문 연
‘오렌지보틀 한남점’(성동구 독서당로39길 43-1)도 있다. 본점은 경기 안양시 동안구에 있다.
상점 안에 시음 방도 있는 ‘애주금호’. 박미향 기자
‘애주금호’(성동구 매봉10길 50 옥수파크힐스상가 B105)는 지난 22일 문 연 따끈한 ‘신상’ 술 상점이다. 평범한 아파트 상가에 터를 잡아 언뜻 지나치기 쉽지만, 대표 천수연(33)씨의 이력을 안다면 문을 안 두드리곤 못 배긴다. 그는 남편이자 쿠캣 대표인 이문주씨를 설득해 쿠캣마켓 코엑스몰에 전통주 섹션을 만든 이다.
2018년께 6년간 근무한 대기업을 그만두고 우리 술 전도사로 나선 그. “우연히 양조장에 갔다가 우리 술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알게 되면서 애주가로서 소주나 맥주만 마시는 생활을 반성했다.” 막걸리학교, 가양주연구소, 수수보리아카데미 등의 강의를 두루 섭렵한 그는 자격증 취득, 관련 서적 탐독 등을 하면서 “주관을 배제한” 자신의 우리 술 철학을 다듬어갔다. “사회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그는 20~30대가 향후 우리 술 시장에 가장 중요한 잠재 고객이란 것도 간파했다. 20~30대의 쿠캣마켓 코엑스몰 재방문율이 높았던 점을 눈여겨본 것이다. 대략 150여종을 배치한 애주금호는 안쪽에 작은 방이 있다. 쿠캣의 음식을 함께 맛보며 우리 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188도깨비’는 안주를 사 와서 시음할 수 있는 술 상점이다. 박미향 기자
지난해 9월께 문 연
‘188도깨비’(성동구 성덕정19길 22 2층)는 비밀 아지트 같다. 손바닥만한 간판에 빨간 불이 켜지면 겨우 찾을 수 있다. 본래 아이티(IT)업계에 몸담았던 대표 정경한(47)씨는 2013년 식초 동호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발효에 관심을 갖게 됐다. 회원 중에는 양조인도 있던 터라 그가 우리 술에 주목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터를 잡은 성수동은 ‘한강주조’ ‘마셥양조’ 등 젊은이가 만든 양조장이 하나둘 자리 잡은 지역이다. 그도 곧 누룩을 직접 빚어 술을 만들 예정이란다. 현재 50~60종 배치한 188도깨비는 여느 술집처럼 테이블과 바 좌석이 꽤 있다. 간단한 음식과 함께 우리 술을 즐기기에 좋다. 정 대표는 말한다. “생주(숙성을 마친 술을 멸균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병입한 술) 위주로만 판매한다.” 피자, 육포, 감바스 등 간단한 안주도 팔지만, 안주를 사 오거나 배달 주문도 가능하다.
술 유통업체 부국상사가 문 연 술 상점 ‘열우물가게’. 사진 김보성 제공
2008년부터 전통주 유통에 힘쓴 부국상사가 술 상점을 열었다. 인천 지역에 기반을 둔 부국상사는 인천 부평구 십정동에
‘열우물가게’(부평구 함봉로 36번길 46-1)를 최근 가오픈했다. ‘십정’은 ‘열 우물’이란 뜻. 우리 술 400여가지가 손님을 기다린다. 부국상사 김보성(44) 대표는 “인천은 지역민들이 우리 술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이 적어서 열게 되었다”고 말한다. 전통주 유통 전문가인 김 대표의 야심작이다. 실제 열우물가게 마당엔 우물이 있는데, 100년이 넘었다고 한다. 땅을 매입하고 발견한 우물이다. 그런가 하면 부산을 거점으로 전통주 프랜차이즈 상점
‘이유있는 술집’을 늘리고 있는 유광상회도 술 유통업체다. 충남, 경기, 서울 잠실(송파구 백제고분로7길 52-24) 등에 체인점이 있다. 이유록(33) 대표는 “어머니와 오빠가 고깃집 등 여러 식당을 하는데, 그곳에서 우리 술을 접하고 미래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