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에서 배우들이 입은 추리닝. 사진 OCN 제공
1만7900원.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OCN)에 등장한 ‘추리닝’을 검색하다 알게 된 추리닝의 인터넷 쇼핑몰 최저가다. 극 중 붉은색 추리닝은 악귀 사냥꾼(카운터)이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출동할 때 입는 작업복(?)이다. 공식 포스터에도 등장해 드라마를 안 본 이도 알 만큼 유명해진 옷이다. ‘생활 밀착형 영웅’ 캐릭터와 드라마 속 B급 유머 코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에 빨간 추리닝보다 더 적합한 옷은 없었겠지만(그래서 배우 김세정보다 실없는 개그를 많이 하는 유준상과 엄혜란에게 더 잘 어울린다), 정작 필자가 궁금했던 건 다른 것이었다. ‘여러 종류 피피엘(PPL·간접광고)을 장면마다 심어놓고, 정작 추리닝은 왜 피피엘로 활용하지 않았을까?’ 소매에 선이 들어간 비슷한 모양새의 추리닝이 패션 브랜드 ‘톰 브라운’에 있다는데 말이다.
‘유스 컬러’를 표방하는 브랜드에서 출시한 추리닝. 사진 골스튜디오 제공
원색보다 무채색 추리닝이 활용도가 높다. 사진 발렌티노 제공
추리닝은 트레이닝에서 온 말이다. 쉽게 풀면 ‘운동복’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 <경이로운 소문>의 헐렁한 폴리에스테르 추리닝을 입고 운동하는 사람은 없다. 소재 기술의 발전 덕에 ‘혈액 순환을 돕고 몸을 탄탄하게 지지해주며 몸이 발산한 에너지를 흡수한 후 근육에 다시 되돌려준다’고 광고하는 제품이 지천으로 깔렸다. 운동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최신 운동복의 경향은 <경이로운 소문>의 작업복보다 <스파이더맨>의 ‘쫄쫄이’에 가깝다.
그러면 도대체 이 촌스러운 추리닝을 왜 입는 걸까? 기능성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남은 답은 하나다. 패션이다. 촌스러운 옷이 유행하는 경향, 다시 말해 최근 주목 받는 1980~1990년대 복고 패션에 추리닝도 포함돼 있어서다. <경이로운 소문>의 배우 조병규는 2002년 개봉한 <품행제로>의 주인공 류승범이 입은 파란색 추리닝과 <킬 빌>의 우마 서먼이 입은 노란색 추리닝을 떠올리게 했다. <품행 제로>의 시대적 배경은 1980년대이다. <킬 빌> 주인공이 입은 추리닝은 1978년께 개봉한 <사망유희>의 이소룡 복장을 오마주한 것이다. 40여년 전 유행했던 추리닝을 전기차가 도로에 달리는 21세기에도 입고 있다.
영화 <품행제로>의 한 장면. 추리닝 입은 주인공이 노래를 하고 있다. 사진 영화사청어람 제공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추리닝 입은 주인공. 사진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제공
<경이로운 소문>의 악귀 사냥꾼이 입은 옷이 그렇듯 추리닝은 위아래 한 벌로 된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는 이 옷을 트랙슈트라고 한다. 트랙슈트가 대중에게 처음으로 회자된 건 1967년 독일 축구선수 프란츠 베켄바워가 아디다스 트랙슈트를 입고 광고에 등장하면서다. 당시 그가 입은 옷 역시 붉은색이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마라토너 프랭크 쇼터가 금메달을 따면서 미국에 조깅 붐이 일었는데, 이 사건으로 추리닝은 대표적인 운동복 지위에 오른다. 1990년대엔 힙합 가수와 유명 댄서들이 이 옷을 일상복처럼 입으면서 지위가 격상된다. 런 디엠시(RUN DMC), 퍼프 대디, 제이지(Jay-Z), 스파이스 걸스 같은 가수들이 기존 질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편으로 추리닝을 입었다.
최근 추리닝을 대거 선보이고 있는 패션 브랜드 ‘구찌’. 사진 구찌 제공
최근 다양한 기능성 운동복이 많이 출시되고 있다. 사진 언더아머 제공
앞서 언급했듯 현재 패션계는 1980~1990년대 스타일에 꽂혀 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고 관심에서 멀어진 스타일과 제품을 ‘새로운 어떤 것’으로 포장하는 것에서 복고가 시작된다. 그렇다고 2세기 전 빅토리아시대 의상을 꺼내 들면 사람들이 어리둥절하니, 한 번쯤 봤거나 한동안 잊고 지낸, 적당히 익숙한 옷을 고르는 게 좋다. ‘한 번쯤’ 본 듯하려면 너무 먼 시대 패션이면 곤란하고, ‘한동안’ 잊고 지냈던 옷이 되려면 물리적으로 일정 기간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1980~1990년대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 않은 과거다. 게다가 트랙슈트는 1990년대를 지나온 이들에게 ‘워크맨’이나 ‘일력’처럼 향수를 자극하는 물건이다.
이제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추리닝은 ‘유행의 선두’라는 칭호와 함께 21세기에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에스엔에스 플랫폼 중 하나인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츄리닝세트’나 ‘추리닝세트’를 검색하면 꽤 많은 양이 뜬다. ‘츄리닝’으로만 검색하면 무려 13만개(12일 기준)가 넘는 게시물이 검색된다. 누군가 추리닝을 입은 사진을 찍고 글을 써서 해시태그에 ‘츄리닝’을 붙여 업로드한 횟수가 13만번이나 된다는 뜻이다. 영어 ‘Tracksuit’를 검색하면 무려 141만개가 뜬다. 추리닝의 인기가 높다 보니 나이키, 아디다스 같은 스포츠 브랜드는 물론이고 구찌, 루이뷔통, 셀린, 발렌티노 같은 글로벌 명품 브랜드에서도 꾸준히 신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골스튜디오, 널디처럼 ‘유스컬처’(열정, 일탈, 반발, 긴장 등 젊은 층의 특징 또는 양식을 대표하는 문화)를 표방하는 브랜드에서도 트랙슈트를 꾸준히 내놓고 있다.
‘츄리닝’과 ‘추리닝’으로 검색한 수많은 게시물을 보면 작성자 절대다수가 제트(Z)세대(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에 태어난 세대)다. 10~20대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조금 과장해 분석하면, 30대 이상은 추리닝을 입지 않거나, 에스엔에스 게시물로 올릴 만한 옷이 못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특정 세대 이상에선 ‘추리닝=추레한 옷’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때때로 추리닝을 입으면 후줄근해 보일 거라는 편견이 공포가 되어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소매에 선이 있는 ‘톰 브라운’의 추리닝. 사진 톰 브라운 제공
발목 부분에 고무줄이 없으면 입기 좀 더 쉬운 추리닝 바지. 사진 무신사 제공
보통 어떤 사안이든 색안경을 끼고 보는 쪽이 손해다. 추리닝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후줄근하게 입은 누군가를 관찰한 경험에서 기인한다. 세수도 안 한 채 바지의 무릎 부분이 늘어난 추리닝을 입고 배회한 이를 봤다고 해서, 게으르다는 혐의를 추리닝에 뒤집어씌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추리닝은 편안해 보인다. 대부분의 운동복은 건강한 기운이 어른거린다. 이는 추리닝도 예외가 아니다. 본인에게 잘 맞는 사이즈와 컬러를 고른다면 출근복으로 입진 못해도 시장이나 백화점 정도는 갈 수 있다. 한 벌로 입는 게 부담스럽다면, 하의와 상의 중 하나만 고르자. 스타일링이 훨씬 쉽다. 만약 키가 작고, 다리가 짧다면 발목에 밴드가 달린 추리닝보다 신발까지 덮는 형태의 제품이 좋다.
옷을 입는 건 사람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는다. 아무리 명품으로 휘감아도 태도가 불량하고 손톱을 안 깎는 등 자신을 더럽게 관리하면 그 사람이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추리닝을 입었지만, 좋은 태도에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하고, 용모가 깔끔하면 게을러 보이지 않는다. 추리닝이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건 아니지만, 피해야 할 옷도 아니다. 물론 때와 장소는 가려서 입어야 한다. 참, 유난히 추리닝 무릎 부분이 쉽게 늘어나는 건 신축성이 좋은 옷이라서다. 고무줄을 반복해서 당기면 늘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임건(<에스콰이어> 디지털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