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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부처의 머리는 구름, 팔은 숲, 다리는 꽃

등록 2021-04-30 05:00수정 2021-04-30 19:21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타이 아우타야
불교사원에 있는 목·다리·팔 없는 불상
낯설고 기묘한 아름다움 동시에 느껴져
왓 차이와타나람 사원에 있는 머리가 없는 불상. 사진 노동효 제공
왓 차이와타나람 사원에 있는 머리가 없는 불상. 사진 노동효 제공

길 아닌 집에서의 시간이 길어져 간다. 여행 중 촬영하고 정리하지 못한 사진과 쌓여 있는 전자우편함을 정리하기로 했다가 열어보지 않은 메일 하나를 발견했다. 발신인 ‘마리아’, 제목 ‘How are you?’ 흔한 외국인 이름에 흔한 스팸메일 제목이었다. 삭제 버튼을 누르려다가 미리보기로 서두를 확인했다. “안녕, 로. 지금은 어느 나라를 여행 중이니?” 나를 아는 사람이었다. 편지를 열었다. “하늘에 뜬 구름이 부처의 발자국 같다던 네 말이 생각났어.” 누군지 기억났다. 아유타야를 떠나기 전 여행사 주인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더랬다. 그때 함께 시간을 보낸 친구가 마리아였다.

아유타야는 동남아시아의 옛 왕국 이름이자 도읍지로 그 뜻은 ‘불멸’이다. 이름과 달리 왕국의 운명은 영원하지 못했다. 14세기에 일어나 현재의 타이,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까지 차지하며 번성했지만 18세기에 이르러 주변국과의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채 사라지고 말았으니까. 대국이 쇠퇴하면 ‘전국시대’가 열린다. 땅을 뺏고 뺏기며 각국의 지도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늘기도 줄기도, 생성되기도 소멸하기도 한다. 제행무상. 늘 그대로 인 건 없고, 늘 그대로 인 건 변한다는 사실 뿐. 문명이 발원한 이래 왕국을 건설한 이들은 언제나 불멸을 꿈꾸지만, 모든 왕국은 우주의 별이 탄생과 소멸을 겪는 사이, 찰나에 피고 사라지는 꽃이다. 항성이 별 먼지를 남기고 꽃이 열매를 남기듯 왕국은 유적을 남긴다. 폐허와 다를 바 없지만 아유타야 역시 앙코르제국 못지않은 유적들을 남겼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타이를 대표하는 관광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아침 일찍 게스트하우스를 나와 왓마하탓으로 향했다. 아유타야 왕조는 400여년간 동남아시아의 무역을 장악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왕궁을 짓고, 사원을 짓고, 탑을 세우고. 500개에 이르는 건축물 중 대부분은 불교사원이고, ‘왓마하탓’은 현재 아유타야를 대표하는 유적이 되었다. 잘린 부처의 머리 때문이다. 나무에서 돋아난 듯한 부처의 얼굴은 ‘앙코르와트’와 더불어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이미지였다. 많은 여행자가 그 이미지를 카메라에 담으려 찾아오지만 관광객 틈바구니에서 마음에 쏙 드는 사진을 촬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동트기 전 길을 나선 것이다.

보리수 뿌리가 감싼 불상의 머리. 사진 노동효 제공
보리수 뿌리가 감싼 불상의 머리. 사진 노동효 제공

기울어진 탑들이 있는 사원으로 들어섰다. 푸른 새벽안개를 뚫고 사진에서 본 장면을 찾았다. 보리수 뿌리가 부처의 얼굴을 감고 있는 모습은 신비로웠다.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 전 꼰바웅 왕국이 아유타야를 침략했고 도시를 파괴했다. 점령군은 불상들의 머리를 잘랐다. 바닥을 뒹굴던 불상의 머리 하나를 보리수가 끌어안았다. 폐허가 된 유적은 도굴꾼의 표적이 되고 잘린 부처의 머리들은 골동품 애호가들에게 팔려나갔다. 보리수가 감싸 안은 머리는 그대로 남았다. 아침 해가 뜨고 밝은 빛이 부처의 미소 위로 내려앉았다. 새들이 날아올랐다.

아유타야 구시가지는 동서 7㎞, 남북 5㎞ 물고기처럼 생긴 섬이다. 3개의 강(차오프라야강, 롭부리강, 빠삭강)이 천연 해자 역할을 하고, 도시로 들고 나기 위해선 다리를 건너야 한다. 왓 마하탓에서 나와 다른 사원들을 차례차례 방문한 후 강을 건너 왓 차이와타나람으로 갔다.

사원 입구에 모형이 있었다. 중앙탑을 가운데 두고 8개의 예배당이 둘러싼 형태였다. 앙코르와트 구조와 거의 흡사한 데 차이점은 힌두교가 아니라 불교사원으로 지어졌다는 것. 명성과 달리 관광객은 드물었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정도로 높은 기온과 습한 날씨 탓이었다. 사원으로 들어섰다. 마주친 광경이 혼미해진 영혼을 더욱 흔들어 놓았다. 사원 테두리를 따라 놓인 불상들이 중앙탑을 향해 가부좌를 틀고 앉았는데, 불상의 개수가 120개에 이른다는 데, 머리가 없었다. 어떤 불상은 몸통도 없고, 어떤 불상은 팔도 없고, 어떤 불상은 발도 없고…. 〈더 플라이〉, 〈비디오 드롬〉 같은 신체변형을 통해 ‘인간다움’에 대해 질문을 했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가 떠올랐다. 낯설고 기묘했다. 근데 이상한 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동시에 느껴졌다는 것이다. 찰칵. 그게 시작이었다.

도무지 설명할 길 없는 열망에 이끌려 나는 목, 다리, 팔 없는 불상들을 한 컷씩 촬영하기 시작했다. 한낮의 내리쬐는 햇볕, 무더운 날씨, 온몸에서 땀이 흘렀다. 고행이었다. 근데 멈출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원 한 바퀴를 돌아 마지막 불상 앞에 섰다. 뷰파인더에 눈을 댔다. 머리 없는 불상 위로 희고 둥그스름한 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원근감이 느껴지지 않는 액정화면 속의 구름이 불상의 머리처럼 보였다. 나는 화들짝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고 실물을 바라보았다. 120개에 이르는 불상을 촬영하면서 생긴 잔영 때문이었을까? 저마다 신체 일부가 없지만 그래서 저마다 신체 일부가 있는 불상들의 실루엣이 하나로 합쳐 보였다. 완벽한 불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잔영의 내부를 채우고 있는 구름, 숲, 야생화…. 모든 불상은 온전했다. 카메라를 내리고 사원을 다시 돌았다. 어떤 불상의 머리는 흰 구름이었으며, 어떤 불상의 팔은 숲이고, 어떤 불상의 발은 야생화였다. 올려다본 하늘에 부처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아유타야 사원의 창문 너머로 바라본 와불. 사진 노동효 제공
아유타야 사원의 창문 너머로 바라본 와불. 사진 노동효 제공

해 질 무렵 숙소로 돌아와 다음날 라오스행 버스를 예약하러 길 건너편 여행사로 갔다. 터미널을 찾아가도 되지만 종일 걷느라 지쳐있었다. 여행사 사장은 20대 여자였다.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버스표가 도착하려면 30분쯤 걸릴 거라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서글서글한 여자였다. 경계 없이 모든 타인을 친구처럼 대하는 사람으로 밝지만 경박하지 않고, 일 처리는 명확하지만 다감한 성격이었다. 사무실 밖에서 스쿠터가 멈추는 소리가 나더니 운동복을 입은 여자가 들어서며 버스표를 사장에게 건넸다.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여자가 나갔다. 사장이 내게 버스표를 내밀며 물었다. “참, 내 이름은 리타야. 저녁에 친구들과 외식을 할 건데 다른 계획 없으면 같이 갈래?” 그를 따라 식당으로 갔다. 두 명의 여자가 테이블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좀 전에 여행사에 들른 여자인데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모양이었다. 리타가 그를 가리키며 “얘는 마리아야, 예쁘지?” 하고 내게 물었다. “응, 아주 예뻐”라고 답하자 또 다른 여자가 “난?”하고 물었다. “음, 걸그룹 멤버 같아.” 세 사람이 깔깔 웃었다. 리타가 말했다. “마리아와 리나는 트랜스젠더야.”

두 사람은 가슴 성형만 했고 돈을 더 모아서 성전환(트랜스섹슈얼)할 거라고 했다. (생물학적 정체성과 본인이 생각하는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시스젠더’의 상대 개념으로서 ‘트랜스젠더’는 생물학적 정체성과 본인이 생각하는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모든 이를 가리킨다. 성전환 여부와는 무관하다) “아유타야에선 어디를 가봤니?” 리나가 물었다. 나는 사원의 불상들을 촬영하다가 경험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내 얘기가 끝나자 마리아가 말했다. “넌 시인이구나! 일몰 보는 걸 좋아해서 나도 종종 그곳에 가는데 그런 생각은 미처 못 했어.” “여행하면서 글 쓰는 일을 해.” “난 방콕에 직장이 있어. 지금은 비수기라서 고향에서 쉬는 중이야.” 내가 촬영한 사진을 들춰보던 리나가 물었다. “내 사진도 한장 찍어줄래?”

왓 차이와타나람 전경. 사진 노동효 제공
왓 차이와타나람 전경. 사진 노동효 제공

아유타야에서의 마지막 밤을 떠올린다. 시스젠더든, 트랜스젠더든 친구가 되는데 중요한 것은 ‘인간다움’일 뿐 ‘성정체성’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던 세계, 그 반대편에 한국이 있다. 다른 성정체성, 다른 성지향성, 다른 피부색, 다른 신체적 조건을 못 견뎌 하는 사회. 얼마 전 그런 한국사회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두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사회적 타살이었다. 차별금지법은 제17대 국회에서 발의된 후 14년이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제정되지 않은 채로 있다. 그사이 많은 이들이 생명을 잃거나 상처투성이 삶을 사는 중이다. “신체 일부가 없든 있든 모든 부처가 온전하게 보였다던 네 말을 종종 떠올리곤 해….” 마리아가 보낸 편지를 읽다가 문득 이하이의 노래를 튼다. 〈내가 이상해〉는 장애, 성별, 인종, 외모, 국적, 성정체성 등으로 차별받는 이들의 심정을 대변한 노래로 들리곤 했다.

“머리는 하나 심장도 하나 / 생각을 하고 공기를 마시고 너랑 똑같이 / 내가 이상해? / 어디가 어떻게 / 내가 이상해? / 왜 그런 눈으로 날 봐/ 내가 이상해? / 어디가 어떻게 / 너의 그 시선에 난 만신창이 /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 찌르면 아프고 계속하면 화내고 / 절망을 하고 희망을 품고 너랑 똑같이 / 하지만 나만 가진 몇 가지 것들 / 너완 다른 몇 가지 것들 / 내가 나인 이유 몇 가지 / 내가 이상해? / 어디가 어떻게 / 내가 이상해? / 왜 그런 눈으로 왜 왜 왜 / 너의 그 시선에 난 만신창이”

노동효 <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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