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 기술을 자동차 제작 과정에 적용한 현대자동차. 그래픽 김은정 기자 ejkim@hani.co.kr, 사진 현대자동차 제공
2015년 여름쯤이었을 거다. 당시 나는 영화감독을 꿈꾸며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 들었던 흥미로운 수업이 있었는데, ‘영화와 사회 현상’이었다. 그 수업은 진행 방식이 조금 독특했다. 교수가 강의하는 게 아니라 발표자 학생이 처음 접하는 영화를 보고, 다른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일종의 프레젠테이션으로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내가 맡은 영화는 ‘가상현실’을 다룬 〈13층〉이었다.
1999년엔 ‘세기말’이라고 해서 디스토피아를 그린 에스에프(SF) 영화들이 많았다. 〈13층〉 역시 그런 영화 중 하나였다. 1999년 개봉 당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아쉬운 컴퓨터 그래픽 때문이었을 거다. 하지만 2015년의 나에겐 굉장히 흥미로웠다. 컴퓨터 그래픽만 차치한다면 영화의 내용이나 감독이 말하려는 주제가 깊고 오묘했으니까. 〈13층〉은 영화 내내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사는 이 현실이 과연 실재인지 아니면 가상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갑자기 영화로 이야기를 시작한 건 최근 요즘 우리 주위를 둘러싼 가상현실 기술 때문이다. 컴퓨터를 활용해 인공적인 기술로 만들어낸 세계, 실제와 유사하지만 실제가 아닌 특정한 환경이나 상황 혹은 그 기술 자체를 우리는 가상현실(VR)이라고 부른다. 비슷한 단어도 있다. 인공현실, 사이버공간, 가상 세계 등이다.
폴크스바겐의 온라인 VR 모터쇼. 폴크스바겐 제공
최근 가상현실 기술은 우리의 현실 세계로 빠르게 흡수되고 있다. 높은 기술력 덕분이다. 가상현실은 기술을 기반으로 사용자의 감각을 자극해 실제와 유사한 몰입감과 현실감을 선사한다. 사용자는 단순히 몰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VR 디바이스를 활용해 조작이나 명령 등을 할 수 있어 가상현실 속에 구현된 것들과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자동차 업계에서도 가상현실의 특징을 활용해 다양한 분야를 개발해왔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비대면을 일컫는 언택트, 온라인에서 만나는 온택트 등과 맞물리며 개발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자동차 업계에서 가상현실 기술이 적극적으로 활용된 곳은 디지털 전시장이다. 과거엔 몇몇 프리미엄 브랜드들만 운영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자동차 전시장 가기를 꺼리는 고객을 위해 자동차 제조사 대부분 디지털 전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VR 디바이스를 이용하거나 인터넷 지도의 거리뷰 방식으로 만나는 것이다. 두 방식의 경계가 명확한 건 아니다. 혼합해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난해 3월 제네시스는 7년 만에 신형 G80을 선보이며 디지털 쇼룸을 공개했다. 고객들은 VR 디바이스를 이용해 실제 쇼룸을 걷는 것과 같은 효과와 함께 G80의 외관과 실내를 살필 수 있었다. 단순히 시각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큐레이터의 설명도 함께했다. 최대한 현장감을 제공하려는 제네시스의 취지에서다. 비슷한 맥락으로 폭스바겐은 코로나19로 인해 제네바 모터쇼가 열리지 않자 온라인으로 가상 모터쇼를 열기도 했다.
베엠베(BMW) 전기차의 가상 엔진음 제작에 참여한 한스 짐머의 스튜디오. BMW 제공
업계뿐 아니라 자동차에서도 가상현실 기술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전기차의 소리다. 전기차가 움직일 때 소리가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 전기차가 움직일 때 우주선에서 날 법한 ‘위잉’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을 거다. 하지만 그 소리는 가짜다. 전기차는 움직일 때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럼 왜 엔지니어들은 전기차에 가상의 소리를 넣었을까?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전기차는 엔진음이 없어 차가 약 2m에 접근해야 보행자가 알아차릴 수 있다. 디젤차의 경우 10m 내외라고 하니 이것과 비교하면 전기차의 사고 위험성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유럽연합(EU)은 2019년 시속 20㎞ 이하로 주행하는 차에 대해 56㏈ 이상의 소리를 활성화하기로 합의했고, 미국 역시 지난해 9월부터 EU와 비슷한 법안을 실행 중이다.
이에 자동차 브랜드들은 자신들의 이미지와 색이 들어간 가상의 전기차 소리를 개발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베엠베(BMW)는 앞으로 출시되는 비전 M 넥스트 기반 모델에서 듣게 될 가상의 소리를 위해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과 〈인셉션〉 등의 음악 감독을 맡은 한스 짐머와 손을 잡았다.
몇 해 전부터 사람들의 흥미를 사로잡은 또 하나의 자동차 속 가상의 요소는 ‘음성 비서’라는 음성인식 시스템이다. 2017년 아마존의 알렉사 기반 스마트 스피커가 자동차 분야로 들어오면서 놀랄 만한 성장과 발전을 이뤘다. 이때부터 음성 비서라는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비서처럼 운전자가 요구하는 작업을 처리하고,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운전자의 음성 명령에 따라 내비게이션 경로 변경뿐 아니라 일정 관리, 메시지 작성 및 전송, 에어컨 온도 조절 등 여러 작업을 수행한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명령을 내려야만 실행하는 게 아닌 시스템이 스스로 운전자 상황을 판단하고 경고하는 시스템도 개발됐다. 계기반이나 운전대에 설치된 카메라가 운전자의 무거워진 눈꺼풀이나 부주의, 곁눈질 등과 운전자의 불필요한 동작을 감지해 졸음운전을 경고하거나 차의 속도를 줄인다. 자동차뿐 아니라 다른 스마트 가전기기에도 응용하는 등 활용 분야가 더욱 확장될 것으로 전망된다.
보쉬가 개발한 운전자 상황 판단 시스템. 보쉬 제공
가상현실 기술은 자동차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자동차 디자인, 개발 과정에서도 그 활약이 두드러진다. 자동차 디자인을 원하는 대로 만들고 주행 환경을 바꿔가며 주행 테스트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런 식으로 개발을 진행한다면 자동차 회사는 신차 개발하는 데 천문학적인 시간과 비용을 투입해야 할 거다. 하지만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하면 그럴 일이 없다. 다양한 디지털 데이터를 바탕으로 가상의 자동차나 주행 환경을 구축해 디자인과 개발에 활용할 수 있다. 자동차 브랜드들이 개발 과정에서 가상현실 기술을 반기는 이유다.
현대·기아차는 2019년 3월 150억원을 투자해 디자인 개발 프로세스를 위한 세계 최대 규모의 디지털 디자인 품평장을 제작했다. 디자인 품평장에서는 세계 각국 20명의 디자이너가 VR 디바이스를 활용해 각도나 조명에 따라 생동감 있게 차를 볼 수 있다. 또 차 안에 들어가 실제 차를 타고 있는 것처럼 실내를 살펴보고 기능을 작동하는 것도 가능하다. 디자인 품평장 안에는 36개의 모션 캡처 센서가 설치돼 있어 VR 디바이스를 착용한 디자이너의 위치와 움직임을 1㎜ 단위로 정밀하게 감지한다. 덕분에 디자이너들은 가상현실 속에서 정확하고 세심하게 디자인을 평가할 수 있다. 현대·기아차는 디자인뿐 아니라 설계 품질 검증 시스템에도 가상현실 기술을 확대 사용할 계획이다.
현실의 것이 아니면서도 실재처럼 보이는 시대, 우리는 지금 가상의 시대에 산다.
김선관(<모터트렌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