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큰 고민 없이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라고 답한다. 1998년 1월 개봉 때 서울 신촌 그랜드 백화점 꼭대기에 있던 그랜드시네마에서 처음 관람했다. 재수 시절 짝사랑했던 누나와 함께였는데, 눈물을 찔찔 짜는 바람에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누나도 울었지만. 며칠 뒤, 나는 다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내 인생 최초의 ‘n차 관람’ 영화였다.
영화는 ‘증명사진’을 중요한 소재로 활용한다. 죽음을 앞둔 정원(한석규)은 스스로 영정 사진을 찍는다. 영화 중간 영정 사진을 찍는 할머니의 에피소드도 나온다. 사진을 찍고 돌아갔다가 한밤중에 사진관을 다시 찾은 할머니는 정원에게 “나 죽을 때 쓸 사진이야, 예쁘게 다시 찍어줘”라고 말한다. 이 사진 속 주인공의 공통점은 모두 웃고 있다는 것. 마지막 모습이 웃는 얼굴로 기억되길 바라는 사람의 마음일 게다.
MZ세대 사이에서 증명사진 찍기가 유행이라길래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을 꺼내봤다. 목불인견. 사진을 준비하지 못해 급하게 지하철 즉석 사진기에서 찍은 사진의 품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막 검거된 연쇄 살인범처럼 눈에 힘이 들어간 ‘인상파’적 표정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창피할 정도였다.
최근 몇달을 기다려야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인기 사진관의 사진을 보니 입이 쩍 벌어졌다. 다양한 포즈와 표정에서 개성이 한껏 묻어 나왔다. 누군가는 과도한 ‘연출’이라며 눈을 흘기지만, 뭐 어떤가. 과도한 인상파보다 훨씬 보기 좋은데.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증명’하려고 했던 걸까. MZ세대의 증명사진이 답을 던져주고 있다. 이정국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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