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의 부캐 중 하나인 이호창 본부장. 유튜브 갈무리
개그맨 이창호는 한 명뿐이다. 동시에 요즘 인기인 유튜브 ‘피식대학’의 등산복 입은 아저씨(한사랑산악회 이택조씨)와 양복 입은 아저씨(이호창 본부장)가 모두 그의 캐릭터다. 왜 이들이 다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여질까? 실감 나기 때문이다. 왜 실감이 날까? 어떤 인간의 세부가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세부 사항은 무엇일까? 이창호의 연기력과 분장도 대단하지만 대부분은 옷이다. 요약하면 그렇게 입고 있으니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개그맨이 무대의상으로의 패션에 능한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희극인들은 원래 인물을 만드는 세부 요소를 관찰하고 표현하는 데에 강했다. 사람들은 내가 어렴풋이 알던 무언가가 다른 사람을 통해 재현될 때 공감하고, 누군가 그걸 실감 나게 재현하며 약간 과장을 섞을 때 재미를 느낀다. 옷은 그 공감과 재미 속 요소 중 하나다. 개그 콩트는 시간이 짧으니 시작하자마자 관객을 특정 상황으로 바로 데려가야 한다. 상황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데에는 옷만 한 것도 없다. 대표적인 경우가 〈개그콘서트〉 ‘분장실의 강 선생님’ 시절의 강유미다. 강유미는 특정 분장 하나만으로도 극이 시작되자마자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귀한 설정 능력이 있었다.
2021년의 강유미는 그때 그 재능으로 오늘날 부캐 세계에서도 살아남았다. 강유미는 자기가 극을 이끌어갈 수 있는 유튜브에서 부캐의 이름으로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막내, 동네 미용실 아주머니, 도를 믿느냐고 물어보는 학생 등을 연기한다. 사람들이 거기에 빠져들 수 있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영상 속 강유미의 패션이다. 도를 믿느냐고 물어보는 여학생은 책가방 끈을 바짝 짧게 메고 있다. 장년층 동네 미용실 아주머니는 묘하게 패턴이 굉장히 화려한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강유미는 ‘분장실의 강선생님’에서 빛났던 특유의 초고해상도 관찰력으로 2021년형 부캐를 창조했고, 그 부캐들은 일상 속 사람들을 재료 삼아 만들어졌다. 그러니 그 안에 자연히 보통 사람들의 패션이 있다.
이창호의 또 다른 부캐인 ‘한사랑 산악회’ 이택조씨. 유튜브 갈무리
개그맨 이창호의 부캐 연기도 흥미롭다. 그는 최근 끝난 유튜브 콘텐츠 비(B)대면 데이트에서 재벌 3세 이호창 본부장을 연기했다. 한사랑산악회에서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등산객 이택조를 연기했다. 이 두 연기가 얼마나 현실적이었냐 하면, 이호창 본부장은 외교부의 캠페인 광고를 찍고 이택조는 라이브 커머스에서 등산복을 팔았을 정도였다.
이창호가 연기하는 부캐들을 보면 티피오(TPO)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TPO는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의 줄임말이다. 시간과 장소와 상황에 맞는 옷차림이 좋다는 뜻이다.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은 좋든 싫든 남에게 보여지고, 의식주 중 의생활이 가장 남에게 많이 보이는 부분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의생활에서의 TPO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호창 본부장은 직장에서 정장 차림이고 이택조는 산에 가는 길에 등산복을 입었으니 둘 다 나름의 TPO를 갖춘 셈이다.
이창호의 부캐 차림을 바탕으로 옷차림 조언을 건넬 수도 있다. 하나는 치수다. 옷을 잘 입는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내 몸에 맞는 옷 그 자체다. 나에게 잘 맞는 옷은 단정한 인상을 주고 싶을 때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좋다. 이른바 ‘스타일링’이란 결국 개인의 몸에 어떤 옷을 얹어 ‘옷+몸’의 합이 어떤 실루엣을 만드느냐의 문제다. 유행하는 실루엣에 따라 사이즈 자체는 커졌다 작아졌다 할 수 있지만 잘 맞는 옷이 주는 단정한 인상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 이호창 본부장의 옷은 하나같이 사이즈가 잘 맞아 단정해 보인다.
다른 하나는 단추다. 한사랑산악회의 이택조는 늘 단추나 지퍼를 내리고 있다. 산에 오르다 보면 더워지니까 뭐든 풀어헤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러다 보면 덜 단정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단정한 옷차림의 좋은 예와 피해야 할 예로 이호창 본부장과 이택조를 들 수 있겠다.
이호창 본부장은 몸에 잘 맞는 정장 차림으로 캐릭터를 현실감 있게 묘사한다. 수트서플라이 제공
패션과 트렌드가 어디로 와서 어떻게 순환할까? 부캐의 옷차림은 심오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개그맨 김민수가 연기한 유튜브 ‘피식대학’ 속 임플란티드 키드가 한 예다. 힙합 애호가가 아니라면 임플란티드 키드의 옷차림이 단순해 보일 것이다. 털모자와 반팔 티셔츠, 아니면 (후디라고 부르는) 모자 달린 긴 팔 티셔츠가 전부다. 현대 사회에서 반팔 티셔츠가 없는 사람은 없을 테고, 털모자나 후디도 마찬가지로 흔하다. 그런데 왜 임플란티드 키드의 옷은 래퍼의 옷으로 보일까? 여기에도 패션의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임플란티드 키드의 힙합 차림새를 완성하는 건 특정 아이템의 아주 사소한 디테일이다. 예를 들어 힙합 아티스트가 털모자를 쓰는 방식은 시대와 캐릭터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진다. 이마의 엠(M)자 라인이 보일 만큼 얕게 쓸 것인가 아니면 깊이 눌러쓸 것인가, 깊이 쓴다면 눈썹을 덮나 안 덮나, 귀는 드러내는가 아닌가. 이 면에서 임플란티드 키드는 래퍼 빈지노의 옷차림을 충실히 따른다. (김민수 본인도 빈지노의 팬이라고 한다) 그래서 김민수는 빈지노가 만든 옷 브랜드를 입고 나온다. 빈지노의 옷 브랜드는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으나 아는 사람들에게는 비밀 결사의 문양처럼 눈에 띈다. 현실 세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빈지노는 힙합을 좋아하는 일군의 애호가와 젊은이에게 인기를 누리고, 사람들은 빈지노의 옷이나 그의 개인 브랜드 옷을 입는다. 개인 단위를 넘어서는 군집이 비슷한 옷을 입으며 ‘OO룩’이라 불릴 자발적 유니폼이 생긴다. 임플란티드 키드는 그걸 묘사하는 중이다.
그러면 어떻게 특정 집단이 비슷한 옷을 입게 될까? 그 정황을 알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 패션 산업의 신비가 있다. 그 당시에는 예측할 수 없던 변수들이 붙어 미국 대도시의 길거리 젊은이 패션이 ‘스트리트 패션’으로 불리며 전 세계 패션 산업의 주류가 되었다. 예전에는 정교하고 값비싼 옷으로 세계를 흔들었던 프랑스의 고가 의류 브랜드까지 스트리트 패션의 문법을 받아들여 옷의 구조를 단순화하고 세숫대야만큼 큰 로고를 붙인다. 이 흐름을 경영의 언어로 부르면 불확실성이며 작가의 언어로 부르면 마술이다.
빈지노가 자신의 브랜드인 아이앱 스튜디오의 옷을 입고 있다. 인스타그램 갈무리
패션은 흔히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었다. 파리를 대표로 하는 패션 세계의 엘리트 디자이너들이 쇼를 통해 시대의 색이나 옷의 형상을 보여주고, 그 영향을 받아 전 세계에서 비슷한 옷이 만들어지며 글로벌 트렌드라는 게 생겼다. 힙합으로 대변되는 미국 서민 계층의 일상복 실루엣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뒤, 지금의 패션은 세계화와 인터넷을 끼고 상부 구조와 하부 구조의 실시간 소통 결과물이 되었다. 요즘 성공하려면 골방에서 실루엣을 만들어내는 외로운 천재가 될 게 아니라, 새로운 신호를 읽고 바로 반응해야 한다. 여기에서 새로운 신호란 조회 수로 대변되는 집단의 신호이며 댓글로 나타나는 익명의 창의성이다.
피식대학이 부캐 시리즈물로 급성장한 비결도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의 적극적인 의사소통이었다. 임플란티드 키드 김민수는 딱 1년 전 ‘알바생 유형별 성대모사’로 유명해졌다. 이 영상에서 김민수는 각 아르바이트생의 특징과 맥락을 파악하는 빼어난 관찰력과 통찰력을 보여준다. 피식대학은 이 영상 하나로 200만 번에 가까운 조회 수를 얻었고, 그 이후 다양한 부캐 시리즈물을 양적으로 많이 기획했으며, 그중 몇 개가 큰 인기를 얻어 전과는 급이 다를 만큼 유명해졌다. 이들 역시 실시간 반응을 바로 반영해 시대의 파도에 올라탔다. 패션도 부캐도 트렌드도, 멀리 떨어져서 들여다보면 성공회로가 크게 다르지 않다.
박찬용(〈디렉토리〉부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