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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바둑

이창호·조훈현 연파한 ‘전설의 철녀’
“김치가 그리우면 돌아올지 몰라요”

등록 2012-01-04 20:11

루이나이웨이(49) 9단
루이나이웨이(49) 9단
한국 떠난 루이나이웨이
남편과 한국서 12년8개월
세계 여자기사 최초 ‘입신’
29개 타이틀 등 숱한 기록
“상하이서 바둑영재 키워요”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철녀’는 상념에 젖은 듯 먼 곳을 응시했다. 소 같은 눈에선 금세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잠시 눈가를 어루만지더니 이내 차분한 표정으로 “한국팬 여러분의 사랑과 관심을 통해 바둑 기사로서 많은 영광과 행복을 누렸다. 귀국 결심을 잘 받아주고 배려해준 여러분들에게 고맙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밥 먹듯 싸움을 벌여온 세계 여자바둑의 철권통치자도 오랜 한국 생활을 마치고 중국으로 떠나는 순간만큼은 무장해제된 듯 평화로워 보였다. 상대의 약점을 콕콕 찌르고, 난해한 수로 정신을 빼놓는 ‘칼’의 기풍은 없었다.

루이나이웨이(49) 9단이 지난달 30일 남편 장주주(50) 9단과 함께 고국인 중국으로 돌아갔다. 1999년 3월 한국기원 객원기사를 거쳐 한국에 정착한 지 12년8개월 만이다. 중국기원과의 불화로 연인 사이였던 장주주와 1990년 고국을 떠나 미국, 일본 등을 떠돌며 ‘집시 바둑’ 생활을 하던 세월까지 합하면 21년여 만의 귀향이다. 루이는 귀국 전인 지난달 28일 2011 바둑대상 시상식에서 동료 기사들과 석별의 정을 나눴다. 시니어상을 받고 무대에 선 루이는 “10년 넘게 한국에서 바둑을 둘 수 있었던 건 무한한 영광이었다”며 거듭 감사를 전했다.

루이가 걸어온 역사는 고스란히 전설로 남았다. 647전 409승238패(승률 63.2%). 그동안 여류 기전 27회 우승 등 모두 29개의 타이틀을 쓸어 담았다. 세계 여자 기사 최초로 입신(9단)의 경지에 오른 것도 그였다. 2000년 이창호와 조훈현을 연파하고 국수전 정상에 오른 것은 한마디로 ‘혁명’이었다. 그때까지 여자는 남자 기사를 이길 수 없다는 바둑계 통념은 무참히 깨졌다.

“2000년 국수전에서 이창호 9단을 이기고 결승에 올라 조훈현 9단까지 꺾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 가장 기뻤던 순간입니다.” 반면 가장 아쉬웠던 순간으로는 같은 해 야마다 기미오 8단과의 삼성화재배 8강전을 꼽았다. “도무지 질 수 없는 바둑이었지요. 이길 수 있는 기회가 17번 있었는데 이를 모두 놓쳐 대역전패를 당했거든요. 지고 나서 며칠 밤을 설쳤습니다.”

‘바둑이 있는 곳은 천당이고 바둑이 없는 곳은 지옥’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에게 계속 돌을 놓을 수 있도록 허락한 한국은 ‘천당’이었다. 하지만 고향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다. “연로하신 부모님과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어요.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온 터에 마침 중국기원에서 ‘조건 없이 환영한다’는 연락을 받고 결단하게 됐죠.”

앞서 루이는 3개월 전 고향인 상하이에 남편과 함께 바둑 교실을 열었다. 부부의 이름을 따 ‘장루이웨이치’라고 이름 붙였다. 웨이치(圍棋)는 바둑의 중국말이다. 현재 바둑 영재 90여명이 이곳에서 배우고 있다. 그는 “돌아가면 고향 상하이에서 바둑 꿈나무들을 키우고, 베이징에서는 대표팀에 소속돼 각종 대국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귀향을 했지만 ‘굿바이’는 아니다.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집도 팔지 않았다. 한국이 아른거릴 때면 가끔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싶었을 터다. “조훈현 국수 사모님이 해마다 김장철이 되면 김치를 보내주세요. 외국 나가 있으면 가장 먼저 생각이 날 정도로 맛있어요. 김치가 먹고 싶어 돌아올지도 몰라요.” 떠나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는 철녀는 순정녀 같았다. 김연기 기자 ykkim@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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