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시드니올림픽이 열리기 며칠 전의 일입니다. 한국 대표팀과 미국 대표팀의 연습경기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당시 선동렬 대표팀 기술위원과 함께 미국 투수들의 불펜 피칭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마이너리그 선수들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라는 가벼운 생각은 이내 놀라움으로 변했습니다. 관중석이 아닌 바로 옆에서 본 투수들의 볼은 정말 위력이 대단했습니다. 모든 구종의 무브먼트(움직임)가 그야말로 상상을 넘는 것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체인지업은 갖고 있던 구질에 대한 이미지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날 보았던 두 투수는 벤 시츠와 로이 오스왈트였습니다. 당시 시츠는 마이너리그 트리플A, 와스왈트는 더블A 선수였지만 이듬해 둘 모두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시츠는 10년 간 94승을 거뒀고 4차례 올스타에 선정됐습니다. 오스왈트는 두 차례 20승을 포함해 13년 간 163승을 거뒀습니다. 올스타에는 3번 선정되었습니다. “손도 크고 손가락이 길어서 볼 잡는 것이 다르고 볼을 채는 힘 역시 달라서 그런 것 같다.” 선동렬 위원과 이런 말을 주고받았지만 충격은 쉬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김현수(28)가 시범경기에서 좀처럼 안타를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21타수 무안타. 10일(한국시각)까지 나온 성적입니다. <볼티모어 선>은 이날 “김현수의 가뭄이 오리올스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보도하면서 부제를 “김현수의 시범경기 초반 부진이 볼티모어에 다른 옵션을 고려하게 만들 수 있다”고 달았습니다. 벅 쇼월터 감독은 “아직은 3월이다. 시간이 남아 있다”고도 했지만 전체 인터뷰를 보면 이런 제목과 부제를 달아도 크게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도 합니다.
리그를 옮기는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응입니다. 한국에서 대할 수 없었던 같은 이름의 다른 공들을 공략해야 하는 것이 지금 김현수가 경기장에서 매일 극복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김현수의 타격은 정밀하다는 점입니다. 김현수가 한국야구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정교한 타격기술이었습니다. 기계로 치면 오차범위가 다른 기계보다 훨씬 작다는 비유가 가능합니다. 오랫동안 한국야구에 맞춰졌던 타격머신이 새로운 볼들을 만나게 되면서 조정에 어려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타석에 들어선 김현수의 표정은 이전과 달라져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편안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희망을 갖게 하는 점도 있습니다. 21타수 무안타가 이어지는 동안 삼진은 3번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미세한 오차로 인해 안타로 이어지지는 못하지만 새로운 볼이 ‘오차 범위 밖’에 있는 정도는 아닌 셈입니다. 얼마나 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김현수가 새로운 볼에 적응할 시간은 남아 있습니다. 빨리 조정을 마치고 정상적인 타격머신이 되기 기원합니다.
박승현 엘에이/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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