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자이언츠 외야수 추재현이 17일 사직 삼성 라이온즈와 경기에서 7회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지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 제공
등판.
사전적 의미로는 ‘야구에서 투수가 마운드에 서는 일’을 뜻한다. 그런데, 요즘 투수가 아니라 야수가 ‘등판’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카를로스 수베로 한화 이글스 감독이 포문을 열었다. 지난 10일 두산 베어스전에서 9회초 1-14로 경기가 기울자 내야수 강경학과 외야수 정진호를 등판시켜 1이닝을 매조졌다.
17일에는 서로 다른 두 구장에서 ‘야수 등판’ 장면이 나왔다. 창원구장에서는 정진호가 엔씨(NC) 다이노스 상대로 4-14로 뒤진 8회말 한화 마지막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아웃카운트 하나를 처리했다. 사직구장에서는 0-12에서 7회초 1아웃부터 추재현, 배성근, 오윤석이 차례대로 마운드에 올라 남은 2⅔이닝을 책임졌다. 1루수 오윤석이 투수로 변신할 때는 배성근이 3루 수비수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야수 3명 등판은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선수 기용은 감독의 고유권한이다. 한정된 엔트리 내에서 최상의 결과를 내려면 야수의 등판도, 반대로 투수의 대주자, 대타 기용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이는 흔한 일이 됐다. 〈엠엘비닷컴〉에 따르면 2008년에는 3차례에 불과했던 야수의 등판이 2018년 75차례에 이어 2019년에는 90차례로 껑충 뛰었다. 조 매든 전 시카고 컵스 감독은 아예 5명 야수를 번갈아가며 경기 후반 마운드에 올리기도 했다. 동일 경기 두 명의 야수 등판은 꽤 있었고 롯데처럼 야수 3명이 연달아 기용된 적도 있다. 1-7로 뒤진 9회 ‘야수 불펜’을 올려 여론의 입길에 오르기도 했다.
‘포지션 파괴’에 대한 시선은 엇갈린다. 현장 투수코치들은 대체로 긍정적 반응이다. 팀마다 투수 뎁스가 약한 상황에서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불펜 투수를 아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 투수코치는 “1이닝이 투수에게는 큰 데미지가 될 수도 있다. 시즌 전체를 고려하면 묘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가뜩이나 개막달인 4월에는 몸이 덜 풀린 상태라 투구 수 등을 조절해줘야만 한다. 또 다른 투수코치도 “그동안 야수의 투수 기용에 대해 용기 내는 감독이나 코치가 부족했는데 수베로 감독 때문에 국내 리그도 이를 받아들이게 됐다”며 반겼다.
반론 또한 만만찮다. 한 해설위원은 “보통 야수 백업이 마운드에 오르는데 그러다가 다치면 누가 책임을 지느냐. 투수도 던지다가 옆구리를 다치는 마당에 야수는 부상 위험이 더 크다. 야구 인생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덧붙여 “포수와 투수는 공 던지는 메커니즘이 비슷하다. 야수보다는 포수가 등판하는 게 더 나을 수 있다”고도 조언했다.
한화 이글스 외야수 정진호가 10일 열린 KBO리그 두산 베어스 전에 등판해 공을 던지고 있다. 한화 이글스 제공
야구에 정답은 없다. 승리로 가는 최적의 길을 찾고, 패배하더라도 다음 경기를 위해 내상을 덜 입어야 한다. 야수를 마운드에 올리는 감독들의 선택도 존중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정 선’은 존재할 것이다.
2군에는 1군 마운드를 마음속에 품고 ‘내일의 공’을 던지는 많은 투수들이 있다. 불펜 투수가 부족하다면 야수 엔트리 하나를 빼서 미완의 대기 투수 한 명을 예비로 올려두는 것은 어떨까. 그들이 던지는 ‘오늘의 공’이 팀의 뎁스를 두텁게 하고 후에 내일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터. 팀 뎁스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정규이닝 기준 27개 아웃카운트 중 8개(29.6%)를 ‘야수 투수들’에게 맡기는 것은 아무래도 야구가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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