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민우(왼쪽)씨가 지난 15일(현지시각) 밤 카타르 도하의 하마드국제공항에서 아르센 벵거(가운데) 전 아스널 감독과 셀카를 찍고 있다. 벵거 전 감독은 피파의 글로벌 발전 책임자로 이번 카타르월드컵에서 피파 기술연구그룹(TSG)을 이끈다. 본인 제공
18일(현지시각) 저녁 도하의 카타르대학 3번 훈련장. 전날 입국한 아르헨티나 축구 대표팀의 첫 공개훈련이 예고된 이곳에는 세계 각국에서 200명 넘는 취재진이 몰렸다. 자리가 밀린 카메라들은 야트막한 언덕 풀숲 위로 올라 삼각대를 펼쳤고, 많은 기자가 스마트폰을 꺼내 속사포 같은 내레이션으로 현장을 중계하고 있었다. 스페인어, 중국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등 온갖 언어가 뒤섞이는 와중에도 만국 공용어처럼 하나의 고유 명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리오넬 메시!”
숱한 별이 뜨는 카타르 도하는 ‘성덕’(성공한 덕후)들을 위한 인내의 장이다. 기자들도 종종 마음속에서 일과 덕질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팬의 마음이 된다. 이날 결국 메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기자들은 빈손으로 발을 돌렸다. 현재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시장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 주전 스트라이커 라우타로 마르티네스(인테르)가 미디어 공개 시간인 15분 동안 열심히 몸을 풀었지만 현장에는 허탈감이 팽배했다.
‘삼고초려’까지 각오했던 기자는 이튿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았다. 전날보다 50여명 정도 숫자가 줄어 있었다. 훈련장에는 전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앙헬 디 마리아(유벤투스)나 파울로 디발라(로마)가 나타나면서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메시를 제외한 25명의 선수가 모두 운동장에 나와 있었다. 한껏 스마트폰 줌을 당겨 디발라 얼굴을 구경하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이에스피엔>(ESPN) 기자가 옆구리를 치며 알려줬다. “메시 나왔어.”
훈련 시작 10분 만에 전담 코치와 함께 걸어 나온 메시는 운동장 귀퉁이에서 어슬렁어슬렁 개인 운동을 했다. 폭발하는 셔터 소리와 함께 현장의 모든 시선이 25명의 선수를 건너뛰고 메시 한 사람에게 ‘올인’됐다. 너무 멀어서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운 수준의, 메시보다는 ‘메시의 잔해’에 가까워 보이는 실루엣을 5분 동안 바라보다가 150여명의 취재진은 해산했다. 전날 퇴근길을 짓눌렀던 허탈함은 포만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리오넬 메시가 19일(현지시각) 카타르 도하의 카타르대학 3번 훈련장에서 개인 훈련을 하고 있다. 도하/로이터 연합뉴스
한국 남자축구 대표팀 주장 손흥민이 16일(현지시각) 새벽 카타르 도하 하마드 국제공항에 도착해 숙소로 이동하기 전 팬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도하/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월드컵 현장에서만 가능한 돌발적인 행복이다. 기자에게 최고의 순간은 15일 늦은 밤 하마드국제공항에서 찾아왔다. 한국 남자축구 대표팀 중에서 가장 늦게 도하에 들어오는 손흥민(토트넘)의 입국 날이었다. 현장에는 국내 취재진 외에도 십수 명의 한국팬들이 대표팀 유니폼 차림으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보안 요원의 통제선을 저도 모르게 한발 한발 넘어서던 한 남성팬의 말이 들렸다. “진짜 떨린다. 첫사랑 만나는 게 이런 느낌일까.”
그리고 기자는 기자의 ‘첫사랑’(?)과 조우했다. 손흥민보다 앞서 입국 게이트로 난데없이 아르센 벵거(73) 전 아스널 감독이 튀어나온 것.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1996년부터 2018년까지 22년 동안 아스널 지휘봉을 잡고 ‘듣보잡’ 감독의 ‘노잼’ 축구팀을 리그 유일 무패우승팀(03∼04시즌)으로 이끈 명장이었다. 말년 무관 세월이 길어지면서 “벵거 나가라”를 외치는 팬들의 비난까지 묵묵히 감수했던 베테랑 감독에게 아스널 팬들은 모두 마음 한쪽에 존경과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
당시 동네 친구들과 손흥민 보러왔던 축구팬 장민우(23)씨도 마침 기자와 비슷한 마음이었다. 벵거 전 감독과 셀카를 찍는 데 성공한 그에게 나중에 물어보니 장민우씨는 다급한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르센, 아르센… 아임 어 구너(Gooner·아스널 팬을 이르는 별칭).” 그는 “자기를 다 (팀에) 헌신하고 하나의 클럽에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다. 제가 정말 좋아한다”라고 팬심을 고백했다. 눈을 반짝이는 그의 고백에 기자가 보탤 단어는 한 음절뿐인 듯 싶었다.
“아르센, 아임 어 구너, 투.”
도하/박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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