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똑이(23)
2년제 대학 축구부 나와
러 2부리그 뛰다 ‘보따리’ 이름이 진짜 오똑이(23·사진)다. 둘째 아들은 철우라 지었지만 맏아들에겐 순수 한글 이름을 붙여준 아버지 오태인씨는 “오뚝이처럼 지내라는 뜻을 담았다”고 했다. 정말 그는 ‘오뚝이’같은 축구인생을 살고 있다. 축구명문팀을 가지 못한 그는 2년제 안동과학대를 거쳐 예원예술대 축구부 3학년으로 편입했다. 168cm·68kg의 조그만 공격수. 청소년 대표 경력도 없이 주변부를 맴돌던 그가 프로팀 레이더망에 걸려들 리 없었다. 2005년 겨울 훈련. 그곳에 러시아 시베리아에 연고를 둔 2부리그 FC시비르 감독과 스카우트가 왔다. 예원예술대와 연습경기를 가진 건국대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서였다. 정작 눈에 띈 건 오똑이였다. “경기도 우리가 0-3으로 졌는데. ‘왜 나인가?’ 정말 당황스러웠죠. 나중에 감독이 많이 뛰는 게 인상적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흔한 대표경력도 없어
최순호 눈에 띄어 실업 입단 그는 2006년 초 3년 계약에 연봉 7만 달러를 받고 러시아로 갔다. “북한 선수들도 내가 온 뒤 러시아에 왔으니까 아시아 선수로는 러시아 진출이 처음이었다”고 했다. 그는 “텃세가 굉장히 심했다. 같은 팀인데도 패스 훈련할 때 공을 안주거나 내가 공을 잡으면 태클로 뺏을 정도였다”고 떠올렸다. “너희들보다 낫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이를 악물었다는 그는 교체용 선수로 한 시즌을 보냈다. 꼬박 하루 걸려 이동하는 먼 거리 원정경기도 많았다. 그러나 자신을 영입한 감독이 팀을 떠나며 입지가 좁아졌다. 보따리를 싸 한국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이대로 쓰러지는 건 그의 이름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올 초 프로 드래프트 기회마저 놓친 그는 한달 전 실업축구 울산현대미포조선 입단 테스트를 두드렸다. 최순호 감독은 “가능성을 봤다. 작지만 빠른 기동력을 인정했다”고 말했다. 더디게 국내 실업축구팀에 들어온 그는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았던 프로 무대로의 승격을 꿈꾸고 있다.
“좀 고생을 해봐야 혹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아프지 않은 법이죠.” 이렇게 말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젊으니까 도전을 계속 해봤으면 좋겠다”고 격려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러 2부리그 뛰다 ‘보따리’ 이름이 진짜 오똑이(23·사진)다. 둘째 아들은 철우라 지었지만 맏아들에겐 순수 한글 이름을 붙여준 아버지 오태인씨는 “오뚝이처럼 지내라는 뜻을 담았다”고 했다. 정말 그는 ‘오뚝이’같은 축구인생을 살고 있다. 축구명문팀을 가지 못한 그는 2년제 안동과학대를 거쳐 예원예술대 축구부 3학년으로 편입했다. 168cm·68kg의 조그만 공격수. 청소년 대표 경력도 없이 주변부를 맴돌던 그가 프로팀 레이더망에 걸려들 리 없었다. 2005년 겨울 훈련. 그곳에 러시아 시베리아에 연고를 둔 2부리그 FC시비르 감독과 스카우트가 왔다. 예원예술대와 연습경기를 가진 건국대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서였다. 정작 눈에 띈 건 오똑이였다. “경기도 우리가 0-3으로 졌는데. ‘왜 나인가?’ 정말 당황스러웠죠. 나중에 감독이 많이 뛰는 게 인상적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흔한 대표경력도 없어
최순호 눈에 띄어 실업 입단 그는 2006년 초 3년 계약에 연봉 7만 달러를 받고 러시아로 갔다. “북한 선수들도 내가 온 뒤 러시아에 왔으니까 아시아 선수로는 러시아 진출이 처음이었다”고 했다. 그는 “텃세가 굉장히 심했다. 같은 팀인데도 패스 훈련할 때 공을 안주거나 내가 공을 잡으면 태클로 뺏을 정도였다”고 떠올렸다. “너희들보다 낫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이를 악물었다는 그는 교체용 선수로 한 시즌을 보냈다. 꼬박 하루 걸려 이동하는 먼 거리 원정경기도 많았다. 그러나 자신을 영입한 감독이 팀을 떠나며 입지가 좁아졌다. 보따리를 싸 한국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이대로 쓰러지는 건 그의 이름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올 초 프로 드래프트 기회마저 놓친 그는 한달 전 실업축구 울산현대미포조선 입단 테스트를 두드렸다. 최순호 감독은 “가능성을 봤다. 작지만 빠른 기동력을 인정했다”고 말했다. 더디게 국내 실업축구팀에 들어온 그는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았던 프로 무대로의 승격을 꿈꾸고 있다.
“좀 고생을 해봐야 혹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아프지 않은 법이죠.” 이렇게 말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젊으니까 도전을 계속 해봤으면 좋겠다”고 격려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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