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게 해 미안합니다. 좀 바빠서요!”
눈뜨고 나니 유명해졌다는 말처럼 박경훈 제주 유나이티드 감독은 인기 상한가다. 정규리그 2위, 챔피언결정전 준우승으로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즌을 마감한 K리그의 스포트라이트는 ‘백발의 신사’에 집중돼 있다. 만년 하위인 제주를 강팀으로 개조한 그는 K리그 올해의 감독 후보에도 올라 있다. 각종 인터뷰 공세에 시달리는 그를 7일 서울 광화문 에스케이(SK)그룹 본사에서 만났다. 에스케이에너지가 제주 유나이티드의 모기업이다.
5일 FC서울과의 챔피언결정전 패배(1-2)가 아픔으로 남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자, 그는 여유 있게 웃으며 “모두가 열심히 했다. 경기는 끝났다”고 정리했다. 판정이 어떻고, 내용이 어떻고 하는 얘기는 부질없다. 올 시즌 ‘긍정의 축구’, ‘즐거운 축구’를 강조해온 그대로 깔끔하다. 그는 “성적도 중요하지만 팬들에게 어떤 축구를 보여주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의 자신감은 허풍이 아니다. 원터치로 이뤄지는 빠른 패스플레이, 문전에 가까워질수록 날카로워지는 공격력,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근성까지 지난해 패배의식에 젖었던 팀이라고 믿겨지지 않는다. 올 시즌 안방무패, 하반기 선두권 유지, 연패기록 전무 등은 새로워진 팀 색깔을 보여준다.
스피드와 패스 축구를 지향하는 박 감독이 의존한 최고의 무기는 ‘칭찬’이다. 패스를 하지 못하고, 패스를 해도 질이 떨어지는 이유는 주입식 환경에서 축구를 배웠고, 실패하면 벤치의 눈치를 봐야 했던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실수하는 선수한테 하늘에 맹세코 단 한 번의 질책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선수들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했다. 샘물처럼 끌어낼수록 더 솟았다”고 했다. FC서울에서 공격수 김은중과 골키퍼 김호준을 영입해 기존 미드필드와 허리의 중핵이었던 구자철과 조용형(현 알라이얀)으로 이어지는 척추라인을 재건한 것도 주효했다. 그는 “수원에서 배기종과 박현범, 서울에서 이상협을 데려와 양 날개도 출력을 높였다”며 “구단이 선수단 구성에 대한 감독의 뜻에 큰 힘을 실어줬다”고 말했다. 선수들한테 국산 엠에프에스(MFS) 골프채를 싸게 구입하도록 주선하는 등 축구 외의 다른 삶을 알아가도록 자극을 줬다.
박 감독이 애초부터 유연한 리더십으로 팀을 혁신하는 전문가는 아니었다. 2007년 17살 이하 세계청소년대회 사령탑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아픔이 전환점. 당시 주변에서는 ‘박 감독이 무슨 감독이냐’라는 비난이 나왔고, 전주대 교수로 옮기면서 축구판에서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아쉬움이 왜 없으랴. 그는 “청소년급에서는 성적보다는 선수들이 발전하고 더 큰길로 나아가도록 경험의 문을 열어주는 게 의미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게 끝났다는 식으로 바라봤다”고 회상했다. 예선 탈락을 해도 호텔에서 탁구 치고 맥주도 마시며 즐거워하는 다른 나라 팀을 볼 때는 경직된 축구 문화의 한계를 느꼈다. 그때의 교훈은 컸다. “선수의 입장에서, 선수를 위해 무엇을 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조급하거나 빨리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차이고 파인 상처에서 굳은살이 돋는다. 현장으로 돌아온 박 감독은 ‘바람처럼’ 빠르고, ‘돌처럼’ 단단하고, ‘여자처럼’ 아름다운 삼다(三多)의 축구로 새바람을 몰고왔다. 그러나 갈 길은 멀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축구를 좋아하는데, 아직 머릿속의 팀 수준에 50%밖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 내년에도 변방의 북소리를 울리기 위해 장고에 들어간 박 감독의 진단이 냉정하다.
글 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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