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용(오른쪽)이 2007년 청소년대표 시절 기성용(왼쪽)과 함께한 모습. 가운데는 당시 팀 관계자. 이청용 제공
[토요판] 이청용의 편지
1군 경기 두번만에 “다시 2군”
1군 경기 두번만에 “다시 2군”
<한겨레>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친한 친구 소식부터 먼저 전해야겠네요. 한국 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파브리스 무암바 이야기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얼마 전 경기 도중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지요. 무암바는 저한테 부탁해 한국어로 팬들에게 감사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고, 제가 재활 중에 가장 자주 만난 동료입니다. 제가 볼턴에서 첫 데뷔골을 넣었을 때도 옆에서 가장 기뻐해준 동료가 무암바였죠. 복귀를 앞두고 무암바와 호흡을 맞출 날만을 기다렸는데 갑작스럽게 끔찍한 일이 터져 제 가슴도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다행히도 여러 팬들과 선수들이 응원을 보내준 덕분에 상태가 많이 호전됐습니다. 지금은 침대에서 일어나 텔레비전도 시청하면서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무암바가 빨리 회복돼 그라운드에 다시 설 수 있도록 한국 팬 여러분들의 응원도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프로 데뷔 시절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서울FC 입단 2년만의 기회
슈팅 한번 못 날렸죠
이듬해 또 기회가 왔습니다
그리고 프로데뷔 첫 골!
나날이 자신감도 커졌어요 어린 나이에 프로에 입문한 선수들이 거의 그렇듯 저도 처음에는 2군에 머물렀습니다. 사실 프로 입단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죠. 어찌 보면 도박에 가까웠다고 할까요. 그래서 저는 그라운드와 동고동락했어요. 기본기 훈련부터 새로 시작했죠. 패스, 볼컨트롤, 슈팅 등 선진 축구의 교육 모델을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연습벌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혹독하게 자신을 혹사시켰죠. 입단 첫해인 2004년에는 최전방 공격수로 뛰다가 6개월쯤 지나고 나서야 측면으로 옮겼습니다. 최전방에 있는 동안에는 왠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 늘 불편했는데, 날개로 옮기니 마치 몸에 날개라도 단 듯 몸이 가벼워지더라고요. 체질에 맞는다고 해야 할까요? 2년간 스타급 선배들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다가 이장수(현 광저우 감독) 전 FC서울 감독의 눈에 띄며 1군 출전 기회를 잡았죠. 2006년 3월12일 마침내 처음으로 1군 무대를 밟았습니다.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수원 삼성과 K리그 개막 경기였는데요. 영광스럽게도 선발 출전이었어요. 낮 2시 경기였는데도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죠. 그날 아침에 아버지(이장근씨)께서 전화를 주셔서 “부담 없이 뛰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오히려 그게 부담이 된 듯해요. 풀타임을 뛰었지만 제대로 된 슈팅 한번 날리지 못하고 허둥댔거든요. 수비에서도 상대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어요. 지금 기억으로는 파울도 많이 하고 경고도 1개 받았던 것 같아요. 경기가 끝나고 감독님께서 저를 쳐다보시지도 않는 거예요. 1군 무대라는 곳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았죠. 그날 숙소에 들어가서 밥을 먹는데 온통 경기 생각에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조차 몰랐을 정도였어요. 그랬는데 감독님께서 사흘 뒤 전북 현대와의 2차전에서도 선발 기회를 주신 거예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신감이 떨어졌고, 그날도 마음먹은 플레이를 전혀 하지 못하다가 전반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교체돼 나왔죠. 벤치로 들어설 때 살짝 감독님 눈치를 살폈더니 싸늘하더군요. ‘아이쿠, 이거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다시 2군행을 통보 받았습니다. 처음 밟아본 1군 무대에서 채 2경기도 뛰어보지 못하고 다시 2군으로 내려갔으니 당시 엄청나게 좌절을 경험했죠. 제 한계가 여기까지인가라는 생각에서부터 어디에서 다시 돌파구를 찾아야 할지 등 고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였어요. 경험과 자신감 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경험이야 경기를 뛰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 해도 자신감은 스스로 충분히 고쳐나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죠. 마침 그해 19살 이하 청소년대표팀에 뽑히면서 새롭게 자신감을 북돋울 수 있었습니다. 6월 독일월드컵 기간에는 주전들이 대거 빠져나간 틈을 타 컵대회에서 2경기를 더 뛰었죠. 당시도 공격 포인트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소중한 경험을 쌓았죠. 어찌 보면 저한테는 2006년이 본격적인 프로생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2006년 프로무대에서 쓰라린 좌절을 경험했기에 지금의 제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듯이 큰 시련을 겪고 나자 저만치 성장해 있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죠. 2007년은 시즌 전 전지훈련에서부터 마음을 다잡아먹고 더 운동화끈을 조였습니다. 당시 셰놀 귀네슈 감독이 새로 우리 팀을 맡게 되셨는데요. 터키 전지훈련 동안 저한테 관심을 많이 보여주시더라고요. 지난 시즌 후회가 많아서 각오를 새롭게 한 것이 감독님 눈에도 띄었던 것 같아요. 연습경기에서 골도 넣고 하자 감독님이 3월4일 대구FC와의 개막전에 저를 선발 출전시켰죠. 그날은 제 축구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죠. 프로 데뷔 첫 골을 터뜨린 날이었거든요. 첫골 상황은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죠. 당시 우리 팀엔 박주영(아스널), 정조국(AS낭시) 선배 등 쟁쟁한 공격수들이 즐비했는데요. 당시 경기가 끝나고 처음으로 기자분들한테 둘러싸여 인터뷰를 했어요. 처음엔 그라운드 위에서 시작했지만 10분이 지나자 어느새 잔디 바깥으로 물러서 있었죠. 처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거여서 저도 모르게 인터뷰 내내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기 때문이죠. 귀네슈 감독님이 철석같이 믿어주니까 플레이도 하루가 다르게 살아났어요. 그해 시즌 23경기에 출전해서 3골을 넣고 도움도 6개를 기록했죠. 2006년에는 갑자기 1군에 올라와 서먹하기도 했는데 2007년엔 형들한테 제가 원하는 걸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어서 편했죠. 특히 수비보다는 공격에 치중하는 플레이를 할 수 있어 좋았고요. 마침 20살 이하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캐나다에서 열린 청소년월드컵 본선에 출전했죠. 열심히 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후회가 많이 남는 대회였어요. 2무1패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는데, 비긴 2경기가 전부 너무 아쉬웠어요. 제가 한발 더 뛰었더라면 이겼을 거라는 생각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당시 (기)성용(셀틱)이와 (박)주호(바젤) 형 등이 저랑 함께 뛰었지요. 아, 큰 시련을 꿋꿋이 극복한 (신)영록이 형도 있었네요. 영록이 형을 떠올리니까 다시 무암바가 생각나네요. 영록이 형이 기적적으로 힘든 일을 극복해냈듯이 무암바도 꼭 일어나 걸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믿습니다. 에고 오늘 편지는 시작과 끝이 좀 우울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찾아야 하겠기에 활짝 웃는 얼굴로 편지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인사드릴게요. 영국 볼턴에서 이청용 드림. 국가대표 축구선수, 프리미어리그 볼턴 소속 정리 김연기 기자 ykkim@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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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팅 한번 못 날렸죠
이듬해 또 기회가 왔습니다
그리고 프로데뷔 첫 골!
나날이 자신감도 커졌어요 어린 나이에 프로에 입문한 선수들이 거의 그렇듯 저도 처음에는 2군에 머물렀습니다. 사실 프로 입단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죠. 어찌 보면 도박에 가까웠다고 할까요. 그래서 저는 그라운드와 동고동락했어요. 기본기 훈련부터 새로 시작했죠. 패스, 볼컨트롤, 슈팅 등 선진 축구의 교육 모델을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연습벌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혹독하게 자신을 혹사시켰죠. 입단 첫해인 2004년에는 최전방 공격수로 뛰다가 6개월쯤 지나고 나서야 측면으로 옮겼습니다. 최전방에 있는 동안에는 왠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 늘 불편했는데, 날개로 옮기니 마치 몸에 날개라도 단 듯 몸이 가벼워지더라고요. 체질에 맞는다고 해야 할까요? 2년간 스타급 선배들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다가 이장수(현 광저우 감독) 전 FC서울 감독의 눈에 띄며 1군 출전 기회를 잡았죠. 2006년 3월12일 마침내 처음으로 1군 무대를 밟았습니다.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수원 삼성과 K리그 개막 경기였는데요. 영광스럽게도 선발 출전이었어요. 낮 2시 경기였는데도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죠. 그날 아침에 아버지(이장근씨)께서 전화를 주셔서 “부담 없이 뛰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오히려 그게 부담이 된 듯해요. 풀타임을 뛰었지만 제대로 된 슈팅 한번 날리지 못하고 허둥댔거든요. 수비에서도 상대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어요. 지금 기억으로는 파울도 많이 하고 경고도 1개 받았던 것 같아요. 경기가 끝나고 감독님께서 저를 쳐다보시지도 않는 거예요. 1군 무대라는 곳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았죠. 그날 숙소에 들어가서 밥을 먹는데 온통 경기 생각에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조차 몰랐을 정도였어요. 그랬는데 감독님께서 사흘 뒤 전북 현대와의 2차전에서도 선발 기회를 주신 거예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신감이 떨어졌고, 그날도 마음먹은 플레이를 전혀 하지 못하다가 전반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교체돼 나왔죠. 벤치로 들어설 때 살짝 감독님 눈치를 살폈더니 싸늘하더군요. ‘아이쿠, 이거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다시 2군행을 통보 받았습니다. 처음 밟아본 1군 무대에서 채 2경기도 뛰어보지 못하고 다시 2군으로 내려갔으니 당시 엄청나게 좌절을 경험했죠. 제 한계가 여기까지인가라는 생각에서부터 어디에서 다시 돌파구를 찾아야 할지 등 고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였어요. 경험과 자신감 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경험이야 경기를 뛰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 해도 자신감은 스스로 충분히 고쳐나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죠. 마침 그해 19살 이하 청소년대표팀에 뽑히면서 새롭게 자신감을 북돋울 수 있었습니다. 6월 독일월드컵 기간에는 주전들이 대거 빠져나간 틈을 타 컵대회에서 2경기를 더 뛰었죠. 당시도 공격 포인트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소중한 경험을 쌓았죠. 어찌 보면 저한테는 2006년이 본격적인 프로생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2006년 프로무대에서 쓰라린 좌절을 경험했기에 지금의 제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듯이 큰 시련을 겪고 나자 저만치 성장해 있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죠. 2007년은 시즌 전 전지훈련에서부터 마음을 다잡아먹고 더 운동화끈을 조였습니다. 당시 셰놀 귀네슈 감독이 새로 우리 팀을 맡게 되셨는데요. 터키 전지훈련 동안 저한테 관심을 많이 보여주시더라고요. 지난 시즌 후회가 많아서 각오를 새롭게 한 것이 감독님 눈에도 띄었던 것 같아요. 연습경기에서 골도 넣고 하자 감독님이 3월4일 대구FC와의 개막전에 저를 선발 출전시켰죠. 그날은 제 축구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죠. 프로 데뷔 첫 골을 터뜨린 날이었거든요. 첫골 상황은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죠. 당시 우리 팀엔 박주영(아스널), 정조국(AS낭시) 선배 등 쟁쟁한 공격수들이 즐비했는데요. 당시 경기가 끝나고 처음으로 기자분들한테 둘러싸여 인터뷰를 했어요. 처음엔 그라운드 위에서 시작했지만 10분이 지나자 어느새 잔디 바깥으로 물러서 있었죠. 처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거여서 저도 모르게 인터뷰 내내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기 때문이죠. 귀네슈 감독님이 철석같이 믿어주니까 플레이도 하루가 다르게 살아났어요. 그해 시즌 23경기에 출전해서 3골을 넣고 도움도 6개를 기록했죠. 2006년에는 갑자기 1군에 올라와 서먹하기도 했는데 2007년엔 형들한테 제가 원하는 걸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어서 편했죠. 특히 수비보다는 공격에 치중하는 플레이를 할 수 있어 좋았고요. 마침 20살 이하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캐나다에서 열린 청소년월드컵 본선에 출전했죠. 열심히 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후회가 많이 남는 대회였어요. 2무1패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는데, 비긴 2경기가 전부 너무 아쉬웠어요. 제가 한발 더 뛰었더라면 이겼을 거라는 생각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당시 (기)성용(셀틱)이와 (박)주호(바젤) 형 등이 저랑 함께 뛰었지요. 아, 큰 시련을 꿋꿋이 극복한 (신)영록이 형도 있었네요. 영록이 형을 떠올리니까 다시 무암바가 생각나네요. 영록이 형이 기적적으로 힘든 일을 극복해냈듯이 무암바도 꼭 일어나 걸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믿습니다. 에고 오늘 편지는 시작과 끝이 좀 우울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찾아야 하겠기에 활짝 웃는 얼굴로 편지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인사드릴게요. 영국 볼턴에서 이청용 드림. 국가대표 축구선수, 프리미어리그 볼턴 소속 정리 김연기 기자 ykkim@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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