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쿵 쿵 쿵쿵’, 붉은악마의 북소리가 축구장에 울려퍼지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 다음에 무엇이 나오는지 안다. “대~한민국!”
하지만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한-중전이 열린 23일 중국 후난성 창사 허룽경기장에선 엉뚱한 소리가 들렸다. “중궈비성(중국필승)!”이었다. 한국 응원단의 다섯차례 북이 울리고 “대~한민국”이 나와야 할 때마다, 주변의 중국 관객들이 같은 박자로 “중궈비성”을 외쳐 눌러버린 것이다. 음절 수가 비슷하고, 응원단 규모의 차이가 워낙 크니 “대~한민국”은 잘 들리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중궈비성”을 가장 크게 외쳤던 것이, 한국 응원단을 ‘보호’하는 임무를 띤 경찰 병력들이었다는 부분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한국 관중석인 22구역 양옆으로 각각 1000명씩 자리를 잡고있던 경찰들이 앞장서서 한국 응원단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다수가 겉에 붉은색 중국 응원단 티셔츠를 입고 있어 언뜻 보면 일반 관객들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하나같이 짧은 머리의 앳된 얼굴에 이른바 ‘건빵주머니’가 달린 바지를 입고 있었다. 현장에 배치됐다는 경찰 학생 2000명인 듯도 했다. 한국 관중과 중국 관중은 출입구와 화장실, 매점 등을 모두 서로 다른 곳을 쓰도록 조정됐지만, 이들은 예외적으로 한국 관중들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보호자’들이었다.
이들 ‘보호 경찰’은 “대~한민국”을 누르는 게 재미있는지 붉은악마의 북소리가 멎을 때마다 깔깔대기도 했다. 정반대편에서 중국 대표팀 응원단 ‘룽즈두이’가 선도하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이들은 눈치껏 경기장의 분위기를 살피며 응원에 합류했다. 제복을 입은 경찰들도 응원에 동참하진 않았지만 자리에 앉아 경기를 관람했다. 한국에서 치안을 위해 배치된 경찰이 경기 내내 관중들만 바라보며 경기장을 등지고 서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한국의 응원은 비록 경찰의 ‘방해’를 받았지만, 그래도 그들 덕분인지 (또는 경기 결과 덕분인지) 2004 아테네올림픽 아시아예선 한-중전 당시 이곳 허룽경기장에서 벌어졌던 ‘불상사’는 되풀이되지 않았다. 당시 한국이 중국을 2-0으로 이기자, 중국 관중들이 중국 선수 벤치에 물병과 오물을 던졌고, 한국 응원석에도 물병을 던지며 난동을 부렸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 여성 1명이 물병에 머리를 맞아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경기에선 경찰들이 양 옆에서 사실상 ‘분리 장벽’이 돼준 덕에 뭔가 던진다 해도 날아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한국의 0-1 패배로 경기가 끝나가자, 후반 40분께 ‘보호 경찰’들은 응원단 티셔츠를 벗고 관중석에서 나가더니 한국 응원단 퇴장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도열했다. 제복 차림으로 한국 응원석 끝줄에 앉아 경기를 지켜본 경찰 왕아무개는 “우리는 모두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나와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사고’는 기존의 우려에 비추면 천만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를 둘러싼 한-중 간의 최근 긴장 국면이 응원단 충돌로 비화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경기장으로 이동하는 한국 응원단 버스에서 한국 외교부 관계자가 중국 경찰의 보호 방침을 설명하자, “경찰이 미리 배치돼있어야 해요. 같이 입장하도록 놔둬선 안 돼요”라는 공포심 어린 반응이 나왔다. 한 여성은 “2004년 사건도 있고 해서 주변에서 웬만하면 가지 말라고 했는데, 그러다보니 이번에 함께 온 분들 숫자가 워낙 적다”고 말했다. 이날 한국 응원석은 붉은악마 원정 응원단 60여명을 포함해 180명에 미치지 못했다.
한 남성은 경기장에 들어오면서 중국 응원단이 모두 붉은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며, “전부 다 ‘붉은악마’라고 생각하자”며 호기로운 모습도 보였다. “꿈을 말처럼 타고 세월에 맞서자”(以夢爲馬不負紹華), “연마하고 앞으로 나아가며 초심을 보여라”(砥礪前行顯初心) 등 중국 룽즈두이가 경기장에 내건 구호들은, “꿈★은 이루어진다”, “그대들의 함성을”, “우리는 그들을 넘어섰다!” 등 지난 22년 동안 붉은악마가 역사에 남긴 주옥같은 구호들을 떠올리게 했다. 경기장을 떠나는 한국 응원단 버스를 보며 손을 흔들어주는 중국 관중들도 있었다. 경기 직후 중국 누리꾼들은 중국 대표팀의 승리를 축하하면서, “사드가 슛을 막진 못한다”, “보이콧은 축구에서 시작한다” 등의 정치적 의미를 담은 글을 남기기도 했다.
창사/글·사진 김외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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