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모여서 보면 더 재밌습니다. 특히 대표팀 축구는 더합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똘똘 뭉쳐 하나의 대상을 욕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그중 하나일 겁니다. 5천만 국민이 감독인 나라,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운명입니다.
지난 10일 스위스에서 열린 한국 축구대표팀과 모로코의 평가전. 신태용 감독은 전반 초반 두골을 내주자 경기 시작 28분 만에 3명을 교체했다. 교체 대기중인 구자철, 정우영, 권창훈(앞쪽부터). 대한축구협회 제공
월드컵 본선 힘겹게 진출하고
평가전 참패하자 비난 폭발
“협회는 ‘적폐’ 기자는 ‘기레기’”
2경기 만에 감독 교체 요구하고
협회 간부는 “막후 실력자” 단죄
‘국민 욕받이'로 소비되는 중
주전 대부분이 해외파·병역특례
2002년 같은 동기부여 사라져
‘FIFA랭킹 51위’ 현실 직시해야
류승완 감독의 2005년작 <주먹이 운다>에서 배우 최민식은 주인공 ‘태식’을 연기한다. 젊은 시절 아시안게임 복싱 은메달리스트였던 태식은 나이가 들어 길거리에서 펀치를 맞아주는 ‘인간 샌드백’으로 푼돈을 번다. 남자는 1분, 여자는 2분에 만원이다. 헤드기어를 쓴 태식, 그에게 펀치를 날리는 손님, 이를 즐기는 구경꾼들. 지금 대한민국 축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풍경과 많이 닮았다.
요즘 대한축구협회와 국가대표팀에서 나오는 모든 소식에는 수확기 포도나무처럼 ‘악플’이 주렁주렁 달린다. 팬들은 포털 뉴스 게시판과 협회 페이스북 페이지로 몰려가 “물러가라”고 외친다. 협회 직원들은 다짜고짜 “야 인마!”로 시작하는 민원 전화를 응대하느라 혼이 빠졌다. 참가자는 적었지만 ‘진짜’ 시위도 벌어졌다. 비난이 차고 넘쳐 이제 대표팀과 상관없는 축구 기사의 댓글 게시판도 성토 풍년이다. 4년에 한 번만 축구를 소비하는 ‘FC코리아 팬’들은 이런 광경을 구경하다가 본능적으로 비난에 동참한다. 대표팀 경기보다 그들을 비난하는 행위 자체가 더 열광적인 스포츠가 된 기분이다.
‘국민 욕받이’가 되기까지
그렇다. 지금 한국에서 축구는 ‘욕받이’ 노릇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출발점은 올 초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막바지였다. 손흥민, 기성용 등 스타플레이어를 보유하고도 대표팀은 아시아 경쟁자들을 압도하지 못한 채 월드컵 본선행이 불투명해졌다. 운명이 걸린 마지막 두 경기를 앞두고 협회는 감독 교체라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어수선하게 출항한 신태용호는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란 과제를 달성했지만, 경기력(2경기 연속 0-0 무승부)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또’ 질타를 받았다.
아이러니하게 바로 다음날 거스 히딩크 핵폭탄이 터졌다. 히딩크 감독 쪽이 “국민이 원한다면 한국 축구에 기여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자마자 여론이 분노의 용암을 내뿜었다. 히딩크 감독 쪽과의 사전 접촉 사실을 부인하던 김호곤 기술위원장은 “금시초문”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로 바꾸면서 천하에 몹쓸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설상가상 조중연 전 회장 체제에서 부적절한 법인카드 사용이 발각되어 협회 임직원들이 입건되는 악재까지 터졌다. 정치적 격변의 학습 효과가 축구 민심에서도 응용되면서 협회와 언론사는 ‘적폐’로, 히딩크 불가론을 표명하는 모든 기자는 ‘기레기’로 낙인찍혔다.
신태용 감독과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지난 7일(현지시각) 모스크바 브이이비(VEB) 아레나에서 열린 러시아와의 평가전에 앞서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모스크바/연합뉴스
대표팀은 10월 추석 연휴 예정된 유럽 원정 2연전에서 분위기 반전을 노렸다. 하지만 러시아에 2-4, 모로코에 1-3으로 참담하게 무너졌다. 평가전의 본래 쓰임새는 폐기된 채 여론은 비난과 조롱을 퍼부었다. 보기 드문 1경기 2자책골을 저지른 수비수 김주영은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평소 K리그부터 지켜봤던 팬, 국가대표팀만 ‘팔로’ 하는 팬, 예능 덕분에 이동국을 알게 되었거나 2002년 히딩크 판타지 이후 처음 축구 쪽에 안테나를 맞춘 대중까지 합심해서 한국 축구를 씹어댄다. 아빠, 엄마, 삼촌, 형제, 자매, 조카, 매형, 처남,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도대체 한국 축구는 왜 이래?”라며 툭, 툭, 툭 던진다. ‘국민 욕받이’의 탄생이다.
현 상황의 본질은 간단하다. 국가대표팀의 경기력이 시원찮아서 팬들이 화가 났다. ‘1+1=2’처럼 명확하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처럼 자연스럽다. 하지만 한국 축구와 팬 사이를 유심히 관찰하면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제일 먼저 국가대표팀의 실력과 팬 기대치의 괴리다.
모로코전 생중계에서 안정환 해설위원의 “월드컵에서 한국보다 못한 나라는 없다”라는 평가가 팬들 사이에서 소위 ‘사이다 발언’으로 지지받았다. 과연 그렇게 통쾌한 펀치일까?
9월14일 기준 국제축구연맹(FIFA) 순위에서 한국은 51위에 있다. 순위 산정 방법이 바뀐 2006년 이후 한국의 최고 순위는 32위(2011년)였다. 2017년 순위표에서 한국의 최고는 37위, 최저는 51위다. 월드컵 본선에는 총 32개 팀이 출전한다. 따라서 안정환의 발언은 매서운 비평이 아니라 평범한 현실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팩트 폭격’일 뿐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한국은 월드컵 본선 참가에 의의를 둬야 할 실력이었다. 물론 중국과 카타르에 당한 패배가 충격을 더하긴 했지만, 거꾸로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한국이 거뒀던 16강 진출도 ‘충격적’이긴 마찬가지다. 2002년과 박지성을 따라 올라갔던 팬들의 눈높이가 아직 그 자리에 남아 한국 축구의 민낯을 인정하기 싫어할 뿐이다.
대한축구협회, 정몽규 회장, 김호곤 기술위원장, 신태용 감독 등 주요 인사들을 향한 사퇴 요구도 다분히 감정적이다. 신태용 감독을 보자. 6월15일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경질되자 여론은 신태용 20살 이하(U-20) 대표팀 감독을 지지했다. 7월4일 그는 A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고, 한 달여 뒤에 궁극적 목표였던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두 경기의 내용으로 신태용 감독은 비난받기 시작했고, 히딩크 이슈가 터지자마자 그는 ‘적폐’가 되어 난타당했다. 고작 두 경기만으로, 고작 두 달여 만에 국가대표팀 감독의 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3년 전, 브라질월드컵 본선 3경기만으로 올림픽 동메달 영웅을 추락시켰던 여론의 변심을 떠올리게 한다. ‘갓틸리케’를 무능력자로 만드는 과정에서도 민심은 인정사정없었다.
김호곤 기술위원장은 자타 공인 ‘적폐 1호’가 되었다. 여론은 그를 막후 조종자 또는 실권자로 묘사한다. 과장을 보태면 마치 ‘최순실’, ‘김기춘’ 같은 존재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팬들이 믿는 만큼 현재 기술위원회의 권한은 광범위하지 않다. 기술위원회가 감독의 거취를 논의하긴 해도 최종 의사결정권자는 언제나 정몽규 회장이다. 실제로 올 3월 시리아전 직후 슈틸리케 감독이 자리를 지킨 것도 이용수 당시 기술위원장의 해임 건의를 정 회장이 거절한 결과였다. 대표팀 운영 면에서 기술위원회는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 선수 선발, 훈련, 관리 등 모든 업무를 신태용 감독과 코칭스태프가 전담한다. 김호곤 위원장은 해외 훈련지 사전답사 등 지원 업무만 거든다. 현 시스템 아래서는 누가 기술위원장을 맡더라도 한국 축구를 좌지우지할 만한 권력은 없다.
문제는 이런 현실을 아무리 설명해도 여론이 받아들이지 않는 데에 있다. 각종 계기로 기본 신뢰가 절멸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단적인 예가 거스 히딩크 논란이다. 축구계와 언론은 불가 입장을 고수한다. 2002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은 협회와 국내 축구계로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 해외파가 거의 없었던 덕분에 선수 소집이 간편했고, K리그 구단의 희생 덕분에 대표팀은 장기 합숙으로 조직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2017년의 환경은 전혀 다르다. 우선 대표팀 소집이 어렵다. 15년 전과 달리 대표팀 선수들 대부분이 외국 리그에서 뛰는 탓에 국제축구연맹의 선수 차출 규정을 따라야 한다. 선수들의 마음가짐도 크게 달라졌다. 4강 멤버들은 대표팀 활약을 발판으로 해외 진출을 꿈꿨던 세대였다. 요즘 대표팀 선수들은 대부분 그 꿈을 이룬 상태다. 심지어 2012년 런던올림픽과 2014년 아시안게임에서 병역문제를 해결한 선수들이 주를 이룬다. 히딩크 감독이 4강 신화를 썼던 당시와 견줘, 동기 부여가 어려운 편이다.
여론은 이런 논리를 거부한다. 물론 ‘히딩크 감독이 오면 성공한다’고 맹신하는 목소리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팬들의 바람은 콕 꼬집어 4강급 성공보다는 새로운 변화에 꽂혀 있다. 15년 전, 히딩크 감독은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체력이 강하다는 한국 축구의 믿음을 정통으로 깨트렸고, 효율적 의사소통을 위해 훈련 및 경기 중 선배 경칭을 없앴다. 지금 팬들이 현 집행부에 외치는 ‘물러나라’, ‘사임하라’는 요구는 결국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며 그 기대감이 ‘히딩크’라는 이름 석 자로 표현되는 것이다. ‘히딩크 감독을 모셔오라’는 직역이 아니라 ‘획기적으로 변하라’고 번역해야 여론의 진심을 좀 더 정확히 읽을 수 있다.
지난 10일 스위스 빌-비엔에서 열린 모로코와의 평가전에 출전한 축구대표팀 선수들. 대한축구협회 제공
비난을 소비하는 지경
어느 분야든지 여론 형성은 그 사회가 살아 있음을 뜻한다. 한국 축구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고, 팬들이 그를 꼬집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 비난 열기는 이성을 멈추게 할 정도로 도가 지나치다. 평소 축구에 관심이 없던 대중까지 비난 대열에 동참하는 현상은 한국 축구가 ‘아무나 욕해도 되는 존재’처럼 인식되는 허탈함을 만든다. 축구는 원래 욕하면서 보는 거라곤 하지만, 지금은 해도 너무하다. ‘헬조선’이라는 분노의 광장 한가운데에 ‘못난이’ 축구를 던져놓고 무차별적 폭력을 휘두르는 군중처럼 보인다. 한국 축구에 대한 편견이 확신으로 바뀌어 비난 수위를 높이고, 비난이 비난을 부르고, 또 다른 비난이 보태지면서 이제는 아예 비난 자체를 소비하는 ‘비난 포르노’처럼 변했다.
필요 이상 자극적이거나 선동적인 의사 표현이 많다는 점을 짚어야 한다.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온라인 독자를 낚듯이 인터넷 공론장에는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댓글이 득세한다. “협회가 세금으로 돌아간다”(협회 예산의 1% 수준이다), “이용수가 기술위원장에서 물러나더니 부회장으로 영전했다”(원래 부회장이었다), “협회가 불리한 댓글을 삭제한다”(축구는 그렇게 엄청난 분야가 아니다) 등이 대표적이다. 축구가 뜨거운 감자가 되자 축구 현장에서 만날 수 없었던 매체들까지 달려들어 축구 기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한 야구 전문매체는 국내 축구계 문제를 파헤친다며 ‘탐사보도’를 내보내고 있다.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언론사의 시장경쟁 본능이 발동하는 것 같다. 지금의 난리 통이 정리된 후에도 그런 댓글과 낯선 숟가락들이 축구 밥상 위에 남아 있을지 의문이다.
한 국가의 축구 발전을 책임지는 조직이라면 그에 걸맞은 운영 능력과 책임감을 지녀야 하고, 국가대표팀은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국민적 관심에 보답해야 한다. 그러지 못해 꾸중을 들으니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지금 한국 축구에 가해지는 형벌은 죄질(?)에 비해 너무 가혹하다. 지금처럼 ‘국민 욕받이’ 신세가 과연 합당한 대접인지는 잘 모르겠다. 2002 월드컵 판타지는 이미 15년 전 과거다. 지금 한국의 피파 랭킹은 51위이며 한국 축구계에 있는 문제의 크기는 우리 사회가 가진, 딱 그 정도다. 그동안 대중은 국내 축구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영화로 시작했으니 영화 이야기로 끝내자. 2001년 곽경택 감독의 <친구>다. 비 오는 날 동수(장동건)는 피를 흘리며 이렇게 말한다. “마이 무따 아이가, 고마해라.”
홍재민 <포포투 한국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