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6일 새벽 4시(한국시각) 뮌헨의 ‘알리안츠 아레나’. 프랑스와 포르투갈의 2006 독일월드컵 4강전을 알리는 휘슬이 불리기 직전, 두팀 주장 지네딘 지단(34·레알 마드리드)과 루이스 피구(〃·인테르밀란)가 센터서클 안에서 악수를 나눈다. 마지막 ‘갈라티코’ 지단과 피구가 두손을 맞잡는 순간, 지구촌 축구팬들의 머리 속에는 화려했던 두 스타의 지난날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둘은 데이비드 베컴, 호나우두, 라울 곤살레스 등과 함께 2000년대 초반 레알 마드리드의 부흥을 이끌었다. 은하수라는 뜻의 갈라티코(갤럭시)는 이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레알 마드리드의 애칭이다.
■ 범상치 않은 어린 시절
1972년생 동갑내기인 둘의 어린 시절은 비슷했다. 알제리 이민 2세인 지단은 프로에 입단하기 전까지 홀로 축구를 배웠고, 피구 역시 독학으로 축구를 익혔다. 14살 때 프랑스 1부리그 AS칸의 축구 아카데미에 들어간 지단은 17살이 되기 전 팀에 합류했고, 1990~1991년 시즌에 이미 주전자리를 굳히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피구도 17살이던 1989년 스포르팅 리스본에 입단하며 프로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 ‘전설’의 탄생
1992년 프랑스의 지롱뎅 드 보르도에 입단한 지단은 1995~1996 시즌 팀을 유럽축구연맹(UEFA)컵 결승전에 올려놓았다. 이 때부터 그에게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미드필더인 미셸 플라티니의 ‘후예’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1994년 체코와의 A매치 데뷔전에서 2골을 터뜨리며 프랑스의 영웅으로 거듭났으며, 결국 1996년 여름 이탈리아 세리에A 유벤투스에 입단하며 빅리그에 발을 들여 놓았다. 1996~1997, 1997~1998 2시즌 연속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끈 지단은 마침내 1998년 안방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프랑스에 첫 월드컵 트로피를 안겼다.
■ 황금세대의 선두주자
1989년은 피구를 비롯한 포르투갈의 ‘황금세대’들이 등장한 해였다. 그해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세계유소년선수권대회에 나가 3위를 차지한 포르투갈의 황금세대들은 2년 뒤 안방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피구의 축구인생은 FC바르셀로나로 옮기면서 꽃을 피웠다. 1995년 유벤투스·파르마와의 이중계약으로 국제축구연맹의 제재를 받았으나, FC바르셀로나의 요한 크루이프 감독을 만나 미드필더에서 오른쪽 날개공격수로 포지션을 바꾸게 된다. 이후의 피구는 바르셀로나의 전설로 불리며 1997~1998, 1998~1999 시즌 등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를 2연패했다.
■ 영웅의 만남
유로 2000 준우승의 활약으로 피구는 2000년 5610만달러의 이적료에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로 둥지를 옮기며 축구판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년 뒤 지단은 6620만달러의 몸값을 받고 피구와 같은 유니폼을 입게 됐다. 둘의 이적료는 현재까지 유럽프로축구 최고 몸값으로 기록돼 있다.
왼쪽 미드필더(지단)와 오른쪽 윙(피구)으로 환상의 조화를 이룬 둘은 2001~2002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2002~2003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우승을 합작하며 레알 마드리드를 정상에 올려놓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은 지단과 피구에게는 나란히 악몽이었다. 부상에서 회복이 덜 된 둘은 힘겨운 조별리그 끝에 16강에 탈락하며 온갖 비난을 뒤집어 썼다. 30대 중반에 들어선 그들에게 독일월드컵은 마지막 무대가 될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 불꽃을 태울 준비가 끝난 지단과 피구. 악수를 나눈 순간부터 90분은 쉼없이 흘러갈 것이다. 그 후 둘 중 하나는 쓸쓸히 경기장을 떠나야 한다. 지단이 될까? 피구가 될까?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