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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스포츠일반

[인터뷰] “이 순간에 몰입하고픈 마음뿐, 지금의 제가 너무 좋은걸요”

등록 2021-07-17 09:25수정 2022-02-08 15:19

[토요판 커버스토리]
이충걸의 인터+뷰 :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차준환

내년 베이징겨울올림픽 프로그램 완성
신체를 강철꽃처럼 아름답게 표현
최연소 쿼드러플과 주니어 세계신
극적인 올림픽 티켓 등 스타성 갖춰
차준환은 노인의 초연함과 소년의 카리스마를 동시에 지녔다. ‘빙판위 강철꽃’ 같은 연기를 보여주는 그는 앞만 보고 나아가고 있다. “연습했던 나를 믿고.”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차준환은 노인의 초연함과 소년의 카리스마를 동시에 지녔다. ‘빙판위 강철꽃’ 같은 연기를 보여주는 그는 앞만 보고 나아가고 있다. “연습했던 나를 믿고.”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지난해 남자 피겨스케이터 차준환의 오른손 사진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수줍은 듯 앳된 얼굴이었지만, 팬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들어 올린 그의 손에는 거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스케이트 신발끈을 묶다가 생긴 것인데 훈련을 위해 얼마나 강하게, 많이 신발끈을 조인 것일까. 차준환의 역동적인 쿼드러플(4회전) 점프와 환상적인 스텝 연기가 그의 단단한 의지, 쉼 없이 반복되는 노력에서 나온 것임을 새삼 보여준 장면이다.

차준환은 내년 2월 베이징을 겨냥하고 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도쿄 여름올림픽이 1년 연기된 터라, 베이징에서 개최되는 겨울올림픽도 불과 7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한국 남자피겨 첫 올림픽 메달을 노리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차준환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면서도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표현하고 싶은 걸 최대한 표현하고, 저희 프로그램이 많은 사람의 기억이나 감정 속에 남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치 불타는 얼음 같은 열정을 가진 스무살 피겨스타의 이야기를 들었다.

차준환을 인터뷰하는 날 아침, 러시아 피겨의 신 알렉세이 야구딘의 ‘아이언 마스크’를 보았다. 더러 지금의 챔피언도 그 전성기에 못 미친다던 야구딘의 탈인간급 스텝에 차준환을 대비시켰다. 곧 공통점을 찾았다. 어떻게 예술과 스포츠가 같은 말일 수 있을까.

경기도 구리의 투썸플레이스 2층 창가 자리. 차준환은 만화에서 빠져나온 소년의 복슬복슬한 얼굴로 들어왔다. 경쾌하고 느슨한 청록색 저지 티셔츠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까만 반바지. 수북하던 도토리 머리는 짧게 파마한 지 조금 되었을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서 셰이린 본 안무가와 내년 2월 베이징겨울올림픽 프로그램을 완성하고 돌아와 한달 반 남짓 되었을 때였다. 그는 목동 실내아이스링크에서 오전 훈련을 마치고 와서, 인터뷰 끝나면 태릉 실내빙상장으로 가는 일정이라고 했다. 더운 날, 듣기만 해도 세포가 식는다.

“오랜 시간 캐나다에서 훈련하다가 코로나 터져서 한국에서 혼자 훈련하고 있는데, 초반에는 헤맸어요. 나름 새 환경이니까. 훈련은 저녁 8시쯤 끝나요. 일요일은 보통 쉬는데, 공원 같은 데서 달리기도 하면서 지상 훈련에 매진하고 있어요. 때로는 레전드 선수도 훈련을 즐기면서 할 수 없다는데, 저는 항상 즐기는 것 같아요. 훈련을 할 때 힘든 만큼 뭔가 해내고 있는 것 같아서 행복해요. 몸을 자꾸 쓰다 보면 지칠 때가 있지만 그럴 때도 계속 연습해요. 어느 정도 피로도가 넘어가면 오히려 피곤이 덜한 것 같아요.”

차준환이 경기도 구리의 한 커피숍에서 인터뷰하던 중 밝게 웃고 있다. 그는 “제 연기가 많은 사람의 기억이나 감정 속에 남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차준환이 경기도 구리의 한 커피숍에서 인터뷰하던 중 밝게 웃고 있다. 그는 “제 연기가 많은 사람의 기억이나 감정 속에 남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강철꽃 같은 그만의 피겨

까만 덴탈마스크 속으로 털실 같은 저음이 들렸다. 어떻게 훈련이 즐거울 수 있을까?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매단 채 퍼그 강아지처럼 얼굴을 찌푸린 선수들만 봤는데. 어쨌든 아직 프로그램을 공개할 순 없다.

“이전 제 프로그램을 짰던 데이비드 윌슨 안무가는 좀더 전통적이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표현이 장점이고, 셰이린 본은 불규칙하지만 현대적인 느낌이 매력적이에요. 저는 워낙 클래식 음악을 많이 해왔는데 마음 가는 대로 표현을 하는 변칙적인 요소들이 신선하더라고요. 제가 무용 베이스의 훈련을 많이 해서 다른 장르의 댄스에서 더 에너지를 얻는 것 같아요. 셰이린 본과 처음 작업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제가 생각한 서정적인 음악과 다르게 편곡됐는데 ‘로미오와 줄리엣’의 현대판 같아서 되게 신선했어요. 인터뷰에서 갑자기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 미국에서 훈련할 때 거기 다른 코치들이 저한테 얘기하시는 게, 스케이팅을 즐기는 것 같아서 너무 좋다, 그게 진정한 피겨스케이트의 매력이다, 이러시는데 되게 기분이 좋더라고요.”

부사를 주어 앞에 쓰는 화법, 대답을 고를 때 “아, 뭐라 하지?” 하며 자문하는 습관, 모든 어미가 “같아요”로 일관되는 이 시절의 보편 어투가 시작부터 온순하게 작렬하기 시작했다.

피겨스케이팅 인프라가 완전히 불완전한 국가에서 어리둥절한 행운처럼 나타난 스케이터는 주니어 시절부터 세계 남자 피겨의 풍향을 살짝 바꾸었다. 그리고 그는 하뉴 유즈루의 필사적인 위풍당당함이랄까, 이 행성에 오직 단 한명 피겨 선수만 바라보라는 듯 비장한 나르시시즘과, 무도회에 간 사립학교 남학생 같은 댄스와 가공할 점프로 세계선수권을 3연패한 미국 네이선 천 사이에서 기술적으로든 예술적으로든 혼란스러운 생물체로 존재하고 있었다.

차준환 피겨의 특성은 신체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다. 강철꽃 같은 상체의 움직임,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의 이음새 없는 선, 형태 없는 음표에 색채를 입히는 능력. 어떤 때는 비평가가 되어 떠들기보다 입을 닫고 감상할 뿐이다. 일생을 바쳐 익힌 모습에 수고와 반복이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구근처럼 저절로 딸려 나온 것 같은 느낌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단순히 재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름날에 차준환을 만난다는 것은 모든 가치가 시들해진 요즘 사조에 얼음 같은 아름다움을 꺼내 보는 것과 같았다. 매 시즌 헤아릴 수 없는 삼투압 과정을 거쳐 공명해온 차준환의 프로그램들은 그 자체로 기록이 되었다. 지금도 신기한 주니어 세계신기록, 국제빙상연맹(ISU) 공인 대회 최연소로 뛰었던 4회전 점프, 29점 차이를 뒤집으며 참가했던 평창겨울올림픽, 한국 최초이자 최고였던 ‘그랑프리 파이널 대회’ 동메달, 그리고 올 3월, 스웨덴 ‘피겨스케이팅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확보한 베이징겨울올림픽 출전권 두장. 파란을 일으키고 드라마를 만드는 스타성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다.

180㎝ 키와 탈지(脫脂)된 몸, 오묘한 신체 비율은 비교적 단구(短軀)인 피겨 스타들 틈에서 대나무처럼 솟았다. 은퇴한 188㎝ 에번 라이서첵이라면 모를까, 최상위에 랭크된 네이선 천, 가기야마 유마, 우노 쇼마, 하뉴 유즈루까지 모두 공중으로 그를 추격해야 할 정도다. 키가 작으면 중심 이동이며 축이 덜 흔들려서일까, 달라진 피겨 유전학의 문제일까.

“주니어 시절부터 4회전 같은 고난도 점프를 계속 시도했는데, 당시에는 성장기라서 몸이 커지면서 조금씩 흔들렸어요. 뭔가 조금만 달라져도 기술이 잘 안됐어요. 제가 평균적으로 다른 선수들보다 키가 크지만 이젠 그것에 익숙해져서 오히려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더 시원시원해 보이는 동작들이. 사실 이젠 어쩔 수 없어요. 이미 키는 커버렸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큰 키를 이용해서 다른 스타일의 점프를 만드는 거예요. 높이와 비거리와 각도를 생각한 최적의 포물선으로 체공 시간을 늘리는 식으로.”

차준환이 지난달 23일 서울 목동 실내아이스링크에서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차준환이 지난달 23일 서울 목동 실내아이스링크에서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180㎝ 큰 키, 단점 될 수도 있지만
나만의 최적 포물선 점프로 바꿔
‘더 파이어 위딘’선 환상 이나바우어
김연아의 ‘유나 스핀’도 연기 가능

하늘 나는 듯 환상의 이나바우어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고를 때 실버 체인 목걸이와 조금 더 얇은 실버 체인 팔찌가 찰랑거렸다. 한국 남자 운동선수들의 보통 심미안으론 적용할 수 없는 스타일 돌연변이랄까. 옅은 오트밀색 주근깨와 동공이 큰데다 짙게 테를 그린 속눈썹 때문에 꼭 오르골 안을 도는 소년 조각 같았다.

“작년 서울에서 열렸던 ‘4대륙 피겨스케이팅 선수권 대회’가 가장 기억나요. 시즌 초반부에 새로운 점프를 막 시도할 때여서 경기력이 되게 안 좋았는데 후반부에 클린 경기를 했거든요.”

그때 프리 프로그램은 ‘더 파이어 위딘’(The fire Within). 차준환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클린을 했다. 어쩌면 음악이 받쳐주듯 안무를 따라올 때 스피드에 불이 붙었다. 무엇보다 심화된 무브먼트. 세부는 중요하다. 신은 작은 것에 머문다고 하니. 요소마다 모듈처럼 쪼개지는 턴과 스핀과 스텝을 온전히 수행하는 사이 두개의 웅장한 4회전 점프. 그리고 면도날 같은 착지. 그러나 점수가 어이없도록 인색해서 보는 마음이 다 휑했다.

“저는 그날 경기에 만족하지만 점수는 아쉬운 부분이 있었어요. 그래도 제가 더 잘하는 수밖에 없어요. 평가를 받는 종목이고, 제가 받은 점수표도 제 거기 때문에. 심판들은 저에게 이런저런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제 안에서 문제점을 찾아 지적했던 부분들을 보완해서 다음 경기에 계속, 계속 보여주는 게 제 마음도 편할 것 같아요.”

이런 걸 두고 ‘멘탈’이 강하다고 하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초연함일까. 어쩐지 이 순간을 앞으로 자주 떠올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2018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 대회’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몇번의 그랑프리 대회를 거쳐 피겨의 절대 강자 6인이 겨루는 결승전에서 동메달을 땄던.

“올림픽 시즌보다 어려운 구성으로 새로운 점프와 (다른 종류의 점프를 붙여 뛰는) 콤비네이션 점프를 추가해서 나간 경기였는데, 연습 때만큼 만족스럽게 했어요. 개인적으론 아쉬움이 한가지 있었어요. 그 전 대회에서 실수하지 않았던 첫번째 4회전 토루프 점프에서 넘어지는 실수를 했어요. 한편으론 나머지 요소를 잘 마무리해서 전체적으로는 만족해요. 경쟁자를 이기기보다는 모험적인 시도를 했는데, 좋은 평가로 마무리돼서.”

사실 그랑프리 파이널 직전, 캐나다 오크빌에서 열린 ‘오텀 클래식 인터내셔널’에선 하뉴에 이은 은메달이었는데, 난공불락 같던 하뉴를 프리에서만큼은 3.31점 차로 이겼다.

“피겨스케이팅은 제가 잘해야 되는 스포츠라고 생각해요. 잘하는 선수들의 경기를 볼 때는 ‘와, 진짜 점프 잘 뛴다’보다 프로그램의 조화가 너무 뛰어나고 완성도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요. 저는 아직 하뉴나 네이선 선수보다 기술적인 부분도 부족하고 경험도 그만큼 없지만, 그들의 페이스를 따라가다가 오히려 리스크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쟤를 이겨야겠다’보다는 준비한 거를 저의 스텝에 맞춰서 하나하나 밟고 싶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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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존경하는 선수를 적시하지 않았다. 우상 따윈 필요 없다고 외치는 펑크록 같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레전드 선수를 많이 봐서.” 정작 그는 비점프 요소에서 가진 패가 아주 많았다. 점프 사이사이를 채우는 기술 요소에서 늘 최고 레벨 4를 받는 코레오 시퀀스며 스텝 시퀀스야말로 차준환 피겨의 성격.

“스텝 시퀀스는 상체 움직임을 좀더 많이 신경 쓰는 편이고, 코레오 시퀀스는 더 많이 움직이면서 이나바우어 같은 예술적인 기술들을 좀더 넣어서 음악에서 표현할 수 있는 최대를 표현하려고 해요.”

‘더 파이어 위딘’에서 완전히 새로워진 이나바우어를 선보였을 때, 옆으로 가며 두 팔을 벌린 채 등을 뒤로 기울이는 순간은 드가 그림 속에서 남자 발레리노가 걸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유기체적인 매혹이랄까. 정확히 에지를 타다가 우아한 체념 상태로 활공하는 순간 이미 그의 상징이 되었다. (이때 뒤가 터진 셔츠는 오페라 코스튬과 같아서, 이나바우어나 격정적인 음악이 길게 펼쳐지는 프레이즈 부분에 길고 긴 여운을 만들었다.)

“그전까지는 이나바우어 들어갈 때 왼쪽 심판을 보다가 오른쪽 심판을 보면서 끝냈는데, 어떻게 하면 더 특색 있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고개를 뒤로 그냥 넘기지 말고 한 바퀴 돌리는 것처럼 왼쪽을 보자, 사람들에게 여운을 남겨주자라는 마음으로 다시 만들었는데 음악이랑 매치가 너무 잘됐어요.”

그리고 프로그램 마지막의 콤비네이션 스핀. 손가락으로 천장을 꿴 채 모터보다 빨리 회전하는데 중력이 고정된 듯, 와이어가 당기듯, 축이 흔들리지 않는다. 곧 오른손은 가슴에 두고, 왼손은 펼친 채 상체를 뒤로 젖히며 빠르게 도는 레이백 스핀은 그대로 엔딩 크레딧이 되었다.

“원래는 마지막에 다리를 잡고 머리 위로 올리는 ‘헤어컷’ 스핀을 했는데 평창올림픽 선발전을 하고 막 그랑프리에 나갈 때 부상으로 손목에 금이 간 다음부터 그 스핀을 못 하게 됐어요. 업라이트 스핀은 똑바로 서서 제자리에서 도는 건데 그걸 뭘로 대체할까 고민하다가 레이백 스핀을 연습했어요. 스피드도 나쁘지 않고, 또 보통 남자 선수들이 레이백 스핀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저만의 시그니처 스핀이 될 것 같았어요.”

차준환은 심지어 김연아가 고안한 ‘유나 스핀’까지 갖추었다.

“유나 스핀은 레벨 4를 받기 위한 관문 중 또 한가지 요소이기도 해요. 저에게는 엄청 어렵지는 않은 기술이지만 다른 선수들은 꽤 어려워하더라고요. 보통 상체 회전만 들어가는데 유나 스핀은 동시에 다리 모양까지 변형시키거든요. 그런 부분들이 좀더 아름답기도 하고 해서 가산점에 좀더 유리하지 않나 싶어요.”

차준환이 지난 3월 스웨덴 ‘피겨스케이팅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스텝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점프 사이를 채우는 기술 요소에서 늘 최고 레벨 4를 받는 코레오 시퀀스며 스텝 시퀀스야말로 차준환 피겨의 성격을 보여준다. 차준환은 올 11월 ‘컵 오브 차이나 대회’와 ‘엔에이치케이(NHK) 트로피 대회’에 이어, 내년 2월 베이징겨울올림픽에서 한국 남자 피겨 첫 올림픽 메달을 노리고 있다. AP 연합뉴스
차준환이 지난 3월 스웨덴 ‘피겨스케이팅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스텝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점프 사이를 채우는 기술 요소에서 늘 최고 레벨 4를 받는 코레오 시퀀스며 스텝 시퀀스야말로 차준환 피겨의 성격을 보여준다. 차준환은 올 11월 ‘컵 오브 차이나 대회’와 ‘엔에이치케이(NHK) 트로피 대회’에 이어, 내년 2월 베이징겨울올림픽에서 한국 남자 피겨 첫 올림픽 메달을 노리고 있다. AP 연합뉴스

4회전 점프는 살코·토루프로 승부
“점프는 기술이지만 또한 예술
올해안 쿼드러플 플립 완성 목표”

1초의 승부, 쿼드러플 점프

한편, 세계 피겨에 특이점이 왔다. 드릴 같은 4회전 점프를 두둑이 장착하지 않고는 시상대에 영원히 오를 수 없다. 심지어 누구는 4회전 악셀을 뛸 거다, 5회전 점프를 시도할 거라는 소리도 왕왕 들린다. 여자 피겨도 워낙 3-3 점프나 트리플 악셀이 가장 난이도 높은 점프였는데 러시아의 소녀 스케이터 군단 알렉산드라 트루소바, 카밀라 발리예바, 안나 셰르바코바가 하도 4회전 점프를 손쉽게 뛰는 통에 3회전 점프가 차라리 심심해 보인다. 어떤 때는 모든 요소가 쿼드러플 점프를 위한 핑계만 같다. 그러나 점프가 피겨의 모든 것이라면 음악은 왜 쓸까?

“점프는 기술이지만 또한 예술이거든요. 스피드를 이용해서 도약을 하고, 높고 넓은 비거리로 점프하고, 착지할 때 이루어지는 음악과의 조화 때문에. 원래는 피겨에 클래식이나 발레 음악만 허용됐는데 보컬이나 현대음악도 허용되면서 예술적인 표현이 많이 발전했어요. 지금은 전체적으로 기술이 좀더 발전하는 시기 같아요.”

그런데 1초 안에 네바퀴를 도는 쿼드러플 점프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인간이 시각적인 동물이라는 걸 믿을 수 없다.

“도약이 잘됐을 때의 4회전 점프 느낌은, 찰나지만 약간 붕 뜨는 기분이 있어요. 공중에서 잠깐 멈췄다가 떨어지는 느낌? 비거리가 멀리 나오는 점프랑 높이가 더 나오는 점프랑 느낌은 달라요. 4회전은 확실히 힘 들어가는 게 다르고 제시간에 도약하지 못할 때가 많아서, 3회전과 똑같은 마음으로 뛰려고 해요.”

현재 차준환이 안정적으로 구사하는 4회전 점프는 살코와 토루프이다.

“아예 다른 쿼드러플 점프를 시도해서 리스크를 만드는 것보다 현재 가진 4회전 살코나 토루프를 발전시키는 게 올림픽 시즌에 좀더 유리한 전략 같아요. 살코는 착지한 뒤의 흐름이나 비거리를 좀더 발전시키고 싶고, 지금 계속 연습하는 쿼드러플 플립도 어느 정도 성공률이 좋고 완성도가 높으면, 올 시즌 가능하면 프로그램 안에 소화하는 게 목표입니다.”

차준환의 스케이팅에는 늘 지적받는 몇 가지가 있다. 유독 트리플 악셀을 뛰기 전의 도입 거리가 길어 그때마다 1초, 2초, 3초…. 속으로 재다 보면 어떤 때는 숨이 넘어갈 것 같다.

“트리플 악셀 뛸 때 제가 생각할 때도 망설임이 있는데, 저도 고쳐야 되는 부분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사실 이 점프를 배울 때의 습관이 아직까지 남아 그런 타이밍으로 굳어진 것 같은데, 쉽게 고쳐지지 않더라고요. 요즘은 도약까지 걸린 길이와 시간을 좀 줄여보려고, 점프 앞에 연결 동작을 넣는 편이에요. 가끔 점프가 회전수 부족 판정을 받기도 하는데, 어떤 때 코치 선생님들도 ‘이건 괜찮은데 그런 판정이 나왔네? 그러기도 하지만, 이미 받은 거기 때문에 다음에는 일말의 의심도 받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차준환은 처음으로 어린 래브라도레트리버같이 크게 웃었다. 늘 얼굴이 안 보인다느니, 답답하다느니 말도 많은 머리를 잘라 이마가 새콤하게 드러나 있었다.

세상은 언제나 두 얼굴을 가지지만, 스포츠의 양면성이 가장 적어 보인다. 스포츠가 정교해지면 예술적인 경험을 만들다가, 최고의 찰나에는 철학적인 논쟁도 일으킬 것이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다 마시고 나니 논리를 넘어서는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식에 반하는 놀라운 의외성이.

“첫번째 점프 때나 중간에 실수가 나왔다고 해도 거기서 끝이 아니에요. 실수에 사로잡혀 버리면 나머지 것까지 다 망치는 거잖아요. 실수는 아무리 연습을 많이 해도 나올 수 있어요. 실수가 나와도 그건 이미 지나간 거고요. 그 뒤에도 아직 남은 것이 많기 때문에 그것들을 잘 수행해내는 게 저에게 이득이고 최선의 방법이에요. 어떤 때는 점프 실수가 예상치 못하게 계속 나와도 심호흡을 하고 연습하듯이 이어가려고 해요. 저는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기분 좋은 상태로 돌아가는 바운스 백이 잘되는 편이에요.”

차준환은 2018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 대회’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역대 한국 남자 피겨 선수가 거둔 최고 성적이다. 그는 “한번 넘어졌지만 경쟁자를 이기기보다는 모험적인 시도를 했는데, 좋은 평가로 마무리돼서 만족스러웠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AP 연합뉴스
차준환은 2018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 대회’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역대 한국 남자 피겨 선수가 거둔 최고 성적이다. 그는 “한번 넘어졌지만 경쟁자를 이기기보다는 모험적인 시도를 했는데, 좋은 평가로 마무리돼서 만족스러웠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AP 연합뉴스

올해 2개 대회와 내년엔 올림픽
“메달 목표지만, 계속 발전해야”

얼음 위에 서는 건 나 자신

낙담을 냉동시켜 바라보는 습관은 어디서 왔을까? 연유같이 부드러운 얼굴 뒤로 저 방패 같은 가슴은?

“저는 항상 대범한 편이에요. 뭔가 자신이 없을 때 소심해지지만 그래도 결국 대범해져요. 소심한 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행사하는 노인의 지배력과 소년의 카리스마. 어릴 때 운동을 시작한 선수들은 다 똑같이 타인과 말하는 법을 모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작은 지혜의 파랑(波浪)이 주위를 빨아들여 몸을 불리는 기분…. 그래도 유달리 긴장했던 경기는 있었다.

“그렇게 티를 많이 내는 편은 아닌데 처음 세계 선수권 나갔을 때, 그해 여러가지 이유로 굉장히 경기를 많이 나갔어요. 시즌 초중반까지 좋은 결과를 계속 이어나가다가 세계 선수권은 거의 그 시즌 열한번째 대회였는데, 당시에 컨디션이 너무 안 좋고 또 부츠 문제도 있었어요. 사이즈도 갑자기 바뀌고. 제가 유독 긴장했던 이유는 만족할 만큼 연습을 못 해서였어요. 그 경기에서 부상도 있었고, 자신감도 좀 떨어졌지만 그래도 경기 끝나고는 항상 홀가분해요.”

경기를 위해 아무리 많은 스태프들이 합세해도 그 순간 얼음 위에 서는 건 선수뿐.

“제 순서가 되면, 앞 선수 점수 발표 기다리며 자세도 잡아보고 감도 되살리다가 이름이 호명된 후에는 경기 시작까지 굉장히 짧은 시간이잖아요. 그때는 뭔가 깊은 생각보다는 심호흡 크게 하고 무조건 앞만 보고 간다, 연습했던 저를 믿고.”

그러나 앞 선수가 엄청난 퍼포먼스로 엄청난 점수와 엄청난 환호를 받는다면?

“저는 경기 때 저한테만 집중하기 때문에 그런 환호성에 크게 위축되지 않아요. 주니어 때는 다 들렸어요. 앞 선수가 되게 잘했나 보다. 막상 링크장에 들어가면 별 느낌이 없더라고요. 빙판에서 경기를 하는 건 저 혼자지만 링크 사이드에 저희 코치도 있고, 심판도 있고, 여러 방향에 관중분들도 있기 때문에 고독하다고 느끼진 않아요. 그래서 뭔가 저의 에너지를 전달해주고 싶어서 프로그램 구성을 짤 때, 첫번째 점프가 왼쪽 전방으로 가면 그다음 점프는 오른쪽 후방으로 간다든가 해서, 비는 공간 없이 사용하는 편이에요. 구석구석 다 가보고 싶어서. 피겨는 기술의 긴박함과 짜릿함도 있지만 심판과 아이 콘택트도 하고 관중과 감정을 공유하는 스포츠잖아요. 저는 그들을 프로그램의 일부분으로, 함께 경기를 한다고 생각해요.”

그사이 피겨 룰이 또 바뀌어 프리 경기 시간도 4분40초에서 4분10초로, 점프도 8개에서 7개로 줄었다.

“이제 어려워졌구나 하는 느낌보다는 솔직히 말해서 좀 아쉬워요. 30초에 뭔가 더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게 줄어버려서.”

그러나 10초도 안 걸리는 뜀틀 경기에 비하면야.

그는 매번의 경기가 나를 위한 선물이야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경기장은 탐험할 것 많은 보물섬. 이제 그렇게 괴롭던 부츠 문제도 얼추 자구책을 찾았다.

“기성화라서 너무 불량만 아니면 어느 정도는 부츠에 맞춰 가기로 했어요. 계속 260㎜를 신다가 최근 사이즈를 살짝 크게 올렸어요. 260은 너무 작고 265는 너무 커서 손으로 누르거나 넓게 손을 봐요.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앞으로 부츠 문제가 좀 덜하지 않을까.”

‘누구처럼’ 아닌 ‘무엇을 위해서’

올 11월, 차준환은 이번에 만든 프로그램으로 2주 연속 ‘컵 오브 차이나 대회'와 ‘엔에이치케이(NHK) 트로피 대회’에 참가한다. 그 시간은 곧 지나고 올림픽 역시 끝날 것이다. 그 후에는? 우리는 한때 타올랐던 운동선수의 기나긴 사회적 적응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빨간 연기를 내뿜다가 5분 안에 명성을 날리고 재가 된 선수들이. 그는 피겨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겠다는 식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일등이 아니면 패배한 거라는 말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면 스포츠의 야망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

“결과적으로는 저 또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지만, 제가 모든 걸 다 했는데도 메달을 따지 못했다면, 거기서 또 발전시켜야겠죠. 캐나다에서 훈련할 때 하비에르 페르난데스가 늦은 나이까지 선수 생활 하는 걸 봤는데, 저도 부상이 없는 한 오래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고 싶어요. 선수 생명이 짧은 만큼 그 시간 안에 제가 표현하고 싶은 걸 최대한 표현하고 싶어요. 그리고 저의 프로그램들이 많은 사람의 기억이나 감정 속에 남았으면 좋겠어요.”

성인의 세계에 들어서면 가치는 변하고 기회는 섞인다. 운이 좋다면 다른 시간 속에서 웃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차준환의 마지막 웃음은 아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누구처럼?’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제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꿈이 있어요. 평창올림픽 선발전을 국내에서 치를 당시에 1, 2차 성적이 저조해서 점수가 많이 뒤져 있었어요. 3차 선발전이 1주 남았을 때 그 꿈을 꾸었어요. 목동에서 경기하는데 제 순서가 되었는데도 얼음 위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계속 대기해야 했어요. 시작하지 않는 경기를 계속 기다리기만 했어요.”

어쩌면 피겨로부터 멀어질까 봐 꽉 쥐고 놓지 않는 꿈이었을까?

“저는 피겨스케이팅을 한 걸 후회한 적이 없어요. 이 종목 자체를 너무 좋아해요. 새 안무 프로그램이 왔을 때도 ‘역시 이 직업을 선택하길 너무 잘했어’라고 생각했어요. 언젠가는 저도 스케이트를 떠나는 순간이 오겠죠. 그러나 지금은 지금의 순간에 몰입하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넓은 창을 파고든 햇빛 때문에 실내가 끓기 시작했다. 차준환은 대기업 마크가 여럿 새겨진 연습복으로 갈아입었다. 그 순간, 유니폼 안에 프레임된 운동선수가 아니라, 두 귀를 쫑긋 세운 소년이 다시 보였다. 그는 모퉁이 계단 난간에 기대거나 조형물에 앉아 턱을 괸 자세로 카메라를 보았다. 렌즈를 쓴 것 같은 까만 눈동자는 햇빛이 꺾여 어둑해진 갈색 배경 앞에서 차분히 반짝거렸다. 오페라 백스테이지에 앉은 듯 남색 줄무늬 양말과 검정 운동화를 신고. 그 자체로 메시지를 만들던 표정은 이따금 쑥스러운 웃음으로 바뀌었다.

“전 친구 없이 지낸 지 굉장히 오래됐어요. 캐나다에 오래 있기도 했고, 항상 훈련만 하고 지냈기 때문에 게임은 거의, 아니 아예 안 하는 편이에요. 그런 게 사실 소소한 행복인 건데, 그런 일상 없이 십대의 시간이 굉장히 빠르게 흘러간 것 같아요.”

그것은 훌륭한 선수만의 고립된 세계일까? 그러나 그는 삶에서 뜯겨 나간 시절을 수선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혼자 지내는 시간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에 대해 바꾸고 싶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저는 제가 너무 좋은데요.”

고개를 갸웃해 보일 때 그 머리카락은 바람에 날리는 잔디 같았다. 차준환은 올해 스무살. 그 눈에는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그는 아무것도 모를 것 같으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저는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요.”

세상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만 한 재능이 무엇일까. 결국 자기가 이해하는 풍경의 아름다움만이 스스로를 건져올릴 것이다. 노자(老子) 같은 생존법으로 피겨 정글북의 모글리가 된 소년이 보여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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