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미가 9일 경남 고성에서 열린 대통령배 전국씨름왕선발대회 매화급 결승전에서 김수현을 상대로 되치기하고 있다. 대한씨름협회 제공.
“그대로 있으면 안 돼! (상대는) 잡채기밖에 없다니까!”
서로의 오른쪽 어깨를 맞댄 채 거친 숨만 몰아쉬며 꿈적 않는 선수를 지켜보던 감독은 핏대를 세웠다. 순간 샅바를 꽉 잡은 손이 상대방을 채며 들어 올려 그대로 모래판에 내리꽂았다. 충격으로 물보라처럼 뿌려진 모래가 경기장에 내려앉자, “으아!”라는 짧은 탄성과 함께 박수가 관중석에서 쏟아졌다.
전국에서 씨름 좀 한다는 남녀노소 680명이 9일 경남 고성군민체육센터에 모였다. 올해로 34회를 맞은 ‘대통령배 전국씨름왕선발대회’는 생활체육으로 씨름을 즐기는 이들의 축제의 장이다. 대한씨름협회에 한 번이라도 등록된 적 없는 아마추어 선수만 참여할 수 있지만, 자세마저 아마추어일 수는 없다.
특히 여자부 경기는 전문 씨름인으로 거듭나는 등용문으로 통한다. 엘리트 코스가 이미 정착된 남자부에 견줘 여자부는 전문 교육 기관도 극소수고 선수층도 얇기 때문이다. 작년 대회 매화급(60㎏ 이하) 우승자 노은수(43)와 준우승자 윤희준(24)은 실업팀에 합류해 전업 씨름 선수가 됐다. 직업·나이 불문 취미 삼아 씨름에 입문해 “상대를 넘겼을 때의 희열감이 주는 맛”에 심취한 이들이 촉촉하게 젖은 고성의 모래판을 달궜다.
강윤지가 9일 경남 고성에서 열린 대통령배 전국씨름왕선발대회 결승전에서 남혜정을 들어 올려 눕히려 하고 있다. 대한씨름협회 제공.
■ 40대 관록과 20대 패기의 대결
여자부 무궁화급(80㎏ 이하) 결승은 40대의 관록과 20대의 패기가 맞붙은 경기였다. 총 29명이 참가한 무궁화급에서 준결승에 오른 4명 중 2명이 40대(예연정 40·남혜정 43)였다. 두 사람 모두 취미로 씨름을 시작한 지 5년이 된 실력자였다. 예연정은 올해 전국생활체육 대장사씨름대회에서 1위에 올랐던 실력자인 강윤지(22)의 벽에 가로막혀 결승 진출이 좌절됐지만, 남혜정은 명지우(21)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은 제법 속도감 있게 진행됐다. 남혜정은 호루라기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주특기인 밀어치기(밀어서 모래판에 눕히는 기술)로 강윤지를 강하게 압박했다. 한발 뒷걸음친 강윤지는 상대의 들린 상체를 부여잡고 두 바퀴를 돌며 중심을 흔들었고, 원심력을 이용한 눕히기로 1차전을 따냈다. 경기 시간은 단 6초. 체력적 열세를 극복하고자 빨리 승부를 내려 했던 남혜정의 의도를 간파한 전략이 먹힌 것이다. 이어진 2차전에서도 강윤지는 5초 만에 밀어치기로 남혜정을 그대로 넘어뜨리며 우승을 확정 지었다.
강윤지가 9일 경남 고성에서 열린 대통령배 전국씨름왕선발대회 무궁화급 결승전에서 우승한 뒤 관중석을 향해 세리모니를 하고 있다. 대한씨름협회 제공.
남혜정은 경기가 끝난 뒤 “이번 대회에 우승하지 못해 아쉽지만, 동호회 활동을 열심히 해 내년에는 1등 한번 해보고 은퇴하고 싶다”며 재도전 의사를 피력했다. 경남뉴스투데이 기자인 그는 씨름 선수를 꿈꾸는 둘째 딸의 연습 상대가 되고자 샅바를 잡았지만, 이제는 삶의 일부가 됐다. 그는 “경기장에서의 고함과 응원이 활력소가 된다”면서 “이기든 지든 즐겁게 경기하고 타 지역 사람들과 여러 대회에서 만나 씨름으로 하나가 되는 경험이 정말 소중하다”고 했다. 딸과 함께 재미 삼아 대회에 출전해왔다는 그는 “내년에 1등하고, 다음부터는 우리 딸이 바통을 이어받았으면 좋겠다”며 미소 지었다.
우승자인 강윤지는 씨름을 시작한 지 1년이 채 안 됐지만, 15살 때 유도를 했던 경험을 발판 삼아 씨름판의 다크호스로 거듭났다. 그는 “씨름은 지고 이기는 게 확실하다. 한번 시작할 때가 무섭지 막상 시작하면 재미에 푹 빠지게 된다”고 했다. 우연히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씨름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졸업 뒤 실업팀에서 활동하길 희망하고 있다.
■ “2등 해도 행복하다”
매화급(60㎏ 이하) 결승은 지난 구례여자천하장사대회에서 나란히 2위와 3위에 오른 대학생 동갑내기 맞수 간 결투였다. 1차전은 김수현(23)의 밭다리걸기(바깥쪽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기술)를 버텨내며 되치기로 응수한 김보미(23)가 가져갔다. 김보미는 2차전에서 밀어치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한 경기를 내줬지만, 마지막 3차전에서 주특기인 앞무릎치기(오른손으로 상대의 무릎을 잡고 상대를 돌려 눕히는 기술)에 성공하며 지난 대회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3차전까지 가는 치열한 경기였지만 승패가 판가름나자 두 선수는 묻은 모래를 털어주며 서로를 격려했다.
두 사람 모두 실업팀을 희망하고 있어 경기 결과에 민감할 수밖에 없지만, 2등을 한 김수현은 경기장을 나가는 순간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2등도 충분히 잘했다고 생각하고 만족한다. 그래서 제 별명이 ‘이등만’이다”라는 소감을 남겼다. 올해 마지막 대회에서 우승의 한을 푼 김보미는 모래판에 오르길 주저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씨름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생각보다 재밌는데 이게 안 해보면 모르거든요. 생각했던 모습대로 상대를 넘겼을 때의 희열감을 맛보게 되면 계속할 수밖에 없어요.”
경남 고성/장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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