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일승 KTF 감독
[만나봅시다] 프로농구 100승 추일승 KTF 감독
그는 말수가 적다. 경기 전 기자들이 농담이라도 건네면 수줍은 표정으로 사람좋은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코트 안에만 들어가면 180도 달라진다. 두팔을 휘저으며 열정적으로 선수들을 지휘한다.
추일승(44) 프로농구 부산 케이티에프(KTF) 감독. 그가 지난 11일 프로무대 세시즌 반만에 100승을 돌파했다. 통산 여덟번째, 현역감독 중에는 다섯번째다. 하지만 그의 100승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다. 무명선수들을 데리고 ‘헝그리 정신’으로 금자탑을 쌓았기 때문이다.
추 감독이 이끄는 케이티에프는 해마다 약체로 평가됐다. 그런데 두 시즌 연속 정규리그 4위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켰고, 핵심선수 2명이 빠져나간 이번 시즌에도 2위를 달리고 있다.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100승을 하던 날 그는 그 흔한 회식도 갖지 않았다. 선수들이 숙소로 케이크와 넥타이 선물을 가지고 들어가 ‘깜짝 파티’만 했을 뿐이다. 그는 “우승하기 전엔 회식을 갖지 않겠다”고 했다. 집념은 무서울 정도다. 지난해 365일 중 집에 들어간 날은 고작 66일이다. 지난해 12월24일 이후 해를 넘겨서도 아직 집에 못가고 있다.
무명선수·약체평가팀 ‘변방농구’로 금자탑
그는 지난 시즌이 끝난 뒤 가장 먼저 담금질에 들어갔다. “목표가 우승”이라고 하면 뜬금없는 소리라고 하던 선수들은 이번 시즌 2위를 달리자, 더욱 의욕을 보이고 있다. 코치를 선발할 때도 지연-학연을 철저히 배제한다. 상무 감독시절 코치로 선임한 서동철 현 삼성 코치가 “그런데 저를 어떻게 아시느냐”며 되물을 정도였다. 그는 “내가 학연이 없는데, 인맥으로 뽑을 수 있느냐”며 웃는다.
‘추일승표 농구’는 조직력과 수비다. 그는 또 식스맨을 주로 활용하는 전술을 즐겨쓴다. 어쩌면 그 자신이 변방에서 농구를 했기 때문에 자연히 식스맨에게 애착이 가는 건지 모른다. 그는 홍대부고 2학년 때 키가 크다는 이유로 농구선수가 됐다. 공부도 곧잘했지만 집안의 반대는 없었다. 은행원이던 아버지가 연식정구 선수로 전국체전에 나갈 정도로 스포츠를 좋아했기 때문. 그러나 농구를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고 2때 일부러 유급했고, 고 3때는 유급생 출전금지 조처로 경기에 나서지도 못했다. 학교쪽은 추 감독 동기들을 모아 같은 재단인 홍익대에 농구부를 창단했다. 물론 성적은 바닥이었다. 1학년 때는 전패했다. 4년간 감독이 4번이나 바뀌었다.
1986년 졸업과 함께 신흥명문 기아자동차에 입단했다. “운이 좋았죠. 연세대와 중앙대 출신이 주축이었는데 저도 곁가지로 뽑혔어요.” 그러나 한기범 유재학 정덕화 등 날고기는 선수들 틈에서 벤치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89년 은퇴한 그는 구단 매니저로 변신했다. 팀내에서 연세대와 중앙대 출신들의 파벌싸움이 극심하자, 홍익대 출신인 그에게 매니저를 맡긴 것이다.
7년간의 구단 매니저와 상무 감독을 거쳐 2003년 6월30일, 코리아텐더(케이티에프의 전신) 감독에 취임했다. 바로 전 시즌 ‘헝그리 돌풍’을 일으키며 4강 신화를 이룬 팀이었다. 그해 성적은 10개 팀 중 공동 7위. 그는 “8연패를 당했을 때 정말 죽고 싶었다”고 했다. 외국인 선수 선발에 실패한 게 원인이었다. 그 뒤 필립 리치와 애런 맥기, 게이브 미나케 등 다른 팀에서 눈여겨 보지 않는 ‘흙속의 진주’를 많이 발굴했다. 미국 대학 졸업반 선수들부터 샅샅이 훑고, 미국 지도자들과 끊임없이 친분을 쌓은 결과다. 잘 뽑은 외국인 선수는 국내 선수와 어우러져 해마다 돌풍의 진원지가 됐다.
추 감독은 “100승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승이 중요하다”며 “정상에 오른 뒤 멋지게 회식을 즐기겠다”고 웃음지었다.
글·사진 부산/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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