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훈 기자의 슬램덩크
꼬마는 서울 신당동에 살았다. 정확히 말하면 중앙시장으로 유명한 황학동이다. 광희초등학교에 다니던 그는 농구의 재미에 푹 빠졌다. 새벽같이 학교에 나가 혼자 공을 튕겼다. 겨울에는 눈쌓인 운동장을 쓸어내고 슈팅연습을 했다.
얼굴이 유난히 까맣던 그는 용산중학교 때 ‘깜씨’라고 불렸다. 그 때는 키가 작아 가드를 봤다. 그의 플레이는 영리했다. 그런데 용산고등학교에 올라가서 키가 성큼성큼 자랐다. 포지션도 센터로 바뀌었다. 고3 때는 전국 최고였다. 한 농구인은 “공을 잡자마자 순식간에 상대 코트로 돌진한 뒤 동료에게 찬스를 내주는 동작은 일품이었다”고 회고했다. 졸업식 날에는 극성스런 연-고대 스카우트 관계자들을 피해 운동장에서 남산 쪽으로 달아나야 했다.
연세대에 진학해 태극마크를 달았다. 하지만 고질적인 무릎부상이 그를 괴롭혔다. 1982년 양 무릎에 두툼한 보호대를 차고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했다. 마침내 만리장성을 넘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결승에서 중국(당시는 중공)을 무너뜨린 뒤 펄쩍펄쩍 뛰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한국농구사의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1984년 3월2일, 그는 점보시리즈 결승에서 라이벌 삼성을 누르고 소속팀 현대에 우승컵을 안긴 뒤 유니폼을 벗었다. 그의 나이 불과 29살이었다.
창원 엘지(LG) 신선우 감독 얘기다. 현역시절 그는 대스타였다. 하지만 은퇴 뒤 무려 10년 가까이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영영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던 코트에 복귀하자, 그는 ‘물 만난 고기’가 됐다. 프로농구 10년 동안 한번도 지휘봉을 놓지 않은 유일한 감독이 됐다. 그동안 챔피언 3회, 정규리그 우승 3회, 플레이오프 진출 7회의 성적을 남겼다. 치밀한 수읽기로 ‘신산’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올해도 그의 팀은 우승권에 근접해 있다.
그가 얼마전 프로농구 감독 최초로 정규리그 통산 300승을 돌파했다. 다른 감독들과는 60승 이상 차이가 난다. 당분간 쫓아오기 힘든 간격이다. ‘한국의 래리 브라운’으로 성장한 황학동 꼬마에게 박수를 보낸다.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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