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랭킹 1위 로거 페더러(왼쪽)와 전 세계랭킹 1위 피트 샘프러스가 20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현대카드 슈퍼매치 VI에서 상대편의 공을 받아치고 있다. 김진수 jsk@hani.co.kr
샘프러스 “패더러 빨라지니 경기 힘들더라”
“당신은 어릴적 내 우상” - “자네를 따라갈 자 없어”
저는 테니스공입니다. 20일 잠실실내체육관 특설무대에서 열린 현대카드 슈퍼매치 Ⅵ에서 전·현직 테니스 황제들의 스매싱에 여기저기 상처가 났지만 어떻습니까. 그들의 손놀림을 직접 느껴본 것만 해도 최고인데요.
1세트 초반. 로저 페더러(26·스위스)가 어릴 적 우상이었던 대선배를 만나 긴장했던 것일까요. 피트 샘프러스(36·미국)의 코너를 찌르는 정교한 서브에 고전하네요. 서브 뒤 네트 앞에 바짝 붙어 펼치는 발리는 그의 전성기 때를 연상케 합니다. 최근 남자 테니스에는 서브 앤드 발리 선수가 드물어 페더러가 당황했을 법도 합니다. 팬들의 함성이 들리네요. 1990년대를 풍미했던 샘프러스의 서브와 발리를 보면서 잠깐이나마 향수에 젖나 봅니다.
현역 황제의 승부욕이 드디어 깨어난 것일까요. 2-4로 뒤졌을 때, 페더러의 몸놀림이 아주 빨라집니다. 신발에 날개라도 단 것처럼 가볍습니다. 어디로 날아가도 샘프러스의 공격을 척척 받아내네요. 샘프러스가 “페더러의 공격·수비 모두 따라올 선수가 없다”고 칭찬할 만하죠. 결국 백핸드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내리 네 게임을 따내면서 1세트를 따가네요. 정말 이기고팠나봅니다. 손을 번쩍 드는 걸 보니.
2세트는 역시 36살 샘프러스에게 무리인가 봅니다. 간간이 저를 라인 안쪽으로 꽂아넣어 보지만, 스물여섯 페더러의 힘있는 샷에는 움직일 엄두를 못 냅니다. 반대로 시즌 상금 천만달러를 돌파한 페더러의 스트로크는 더욱 강력해집니다. 샘프러스는 몸상태가 안 좋은지 이따금 허리도 만집니다.
1시간2분의 친선경기는 페더러의 2-0(6:4/6:3) 승리로 마감됩니다. 경기 후 페더러가 말하네요. “어릴 적 우상(샘프러스)의 동작을 따라하면서 훈련했기 때문에 마치 거울을 보면서 경기를 하는 듯 했다. 은퇴한 지 5년이 됐는데도 서브가 굉장했고, 경기내용도 좋았다.” 샘프러스도 웃으며 말합니다. “페더러가 1세트 중반 이후에 몸이 풀리니 경기하기가 힘들었다. 공백기를 생각하면 그다지 나쁜 경기는 아니었다. 서브는 자신있었는데, 발리가 예전만큼 빠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페더러가 의미있는 말을 남기네요. “테니스는 패배자의 스포츠다. 오직 한 사람만 이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만은 예외인 것 같네요. 황제의 샷을 보여준 페더러나, 공백기에도 불구하고 전성기의 서브를 보여준 샘프러스나 모두 승리자였으니까요.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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