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정이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여자배구에서 동독을 상대로 스파이크를 날리고 있다. 오른쪽사진은 일본전 경기 모습.
세계가 놀란 165cm ‘작은새’…여자배구 올림픽 첫 메달 주역
조창수 야구감독과 결혼해 화제 “이젠 골퍼 두 딸 뒷바라지”
조창수 야구감독과 결혼해 화제 “이젠 골퍼 두 딸 뒷바라지”
[그때 그 선수] ② 조혜정
‘백넘버 12번 반찬의 명수’란 별명이 그 시대를 드러내보이는 듯하다. 그게 37년 전인 1970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 때의 일이다.
“대표팀 막내니까, 주전자(물) 당번을 했고, 음식도 날라야 했죠.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주방에 들락거리며 배달하자, 주방에만 들어갔다 나오면 맛난 음식을 척척 만들어 내오는 선수로 착각한 것이지요.”
그가 국가대표로 데뷔하던 해에 겪었던 추억이다. “12번은요? 막내는 끝 번호를 달아야 했거든요.”
‘날으는 작은새’ 조혜정(54)은 서울 숭의여고 3학년, 열일곱살에 태극마크를 처음 달았다. 그해 고교배구 전승을 한 덕택이다. 설움도 많았다. 출중한 기량에 비해 키가 작았던 탓이다. 늘 주전에서 밀려 뒷바라지만 하다보니, 경기는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했다.
“부산여중 때에도 최우수선수가 됐는데, 명문고교팀 스카우트를 받지 못했죠. 키 때문이었죠.” 전국대회 우승을 함께 일궜던 친구들이 명문팀으로 간 반면, 무남독녀인 그는 외면당한 선수들만 끌어모은 숭의여고로, 그것도 홀어머니를 부산에 남겨두고, 서울로 혼자 상경하게 됐다.
중학교 때부터 자라지 않은 키는 1m65에서 그쳤다. 배구계는 ‘재능많은’ 단신을 외면했다. “참다못해 고3때 정형외과를 찾았죠. 키를 크게 해줄 수 없냐고.”
결국 그는 부단한 개인연습과 줄넘기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고, 피나는 연습 끝에 제자리 높이뛰기(서전트 점프) 68㎝, 러닝점프 72㎝라는 놀라운 기량을 갖추게 됐다.
그의 첫 올림픽 도전은 1972년 뮌헨이었다. 그해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의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 습격사건까지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북한에 져 4위로 밀렸고, 대표팀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너무 긴장되고, 무서워서 다들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죠. 남들 다 고개 떨굴 때 전 새로운 걸 발견했습니다. 이 작은 키로도 세계무대에서 통한다는 것을.”
마침내 1973년 우루과이 월드컵 최우수선수가 됐고, 이듬해 멕시코세계선수권에선 한국이 세계 3위에 올랐다. 사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동메달은 이런 실력의 재확인이었다.
세계적인 선수로 명성을 얻자 그는 1979년 한국 여자 1호로 이탈리아에 진출했다. “지금 박기원 LIG손해보험 감독이 나를 불렀고, 그 다음 내가 김호철 감독을 이탈리아로 부르게 됐습니다.”
1981년 최고의 명성을 날리던 광주일고의 조창수(58) 야구감독과 결혼을 했다. 이젠 세계 골프무대를 두드리려는 두 딸(윤희·25, 윤지·16)의 뒷바라지를 위해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의 오크밸리CC 인근 아파트로 이사한 지 2년이 됐다. 아버지와 연습라운딩 중인 막내를 기다리던 그가 말했다.
“배구는 희생의 스포츠입니다. 나의 공을 받을 다음 선수를 위해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늘 생각해야 합니다. 두 수, 세 수를 내다보는, 바둑보다 더 바삐 몸을 움직이면서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끊임없는 노력이 요구되지요.”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인 몬트리올올림픽. 그는 자신을 견제하려는 상대를 따돌리려고, 번호를 바꾼다. 그런데 그게 12번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대표팀은 12번에서 시작해 12번으로 끝났네요.”
원주/권오상 기자 kos@hani.co.kr
조혜정(54)
| |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