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구(오른쪽)가 84년 8월18일 WBC 라이트 플라이급 4차방어전 1라운드에서 일본의 도까시끼를 오른손 훅으로 다운시키고 있다. 9라운드 KO로 이긴 장정구는 당시 “너무 더웠고, 상대가 계속 밀고 들어와 몇번이나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불과 며칠 전에 광복절이 지났고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그럴 수 없었다”고 했다. 연합뉴스
[그때그선수] ④ 장정구
스무살에 WBC 세계챔피언 벨트
아시아 최초 15차 방어 성공하기도
“벨트 반납뒤 링에 돌아오지 말것을…” 오른손 훅에 턱이 걸렸다. 아…. 그가 쓰러졌다. 일어났지만 비틀거렸다. 그러더니 ‘쿵’하며 링으로 몸이 또 무너졌다. 다시 몸을 일으켰다. 주먹이 얼굴에 날아들었다. 몸이 뒤로 젖혀지고는 링에 부딪혔다. 무릎을 꿇고 숨을 힘겹게 내뱉던 그가 간신히 일어났다. 심판 가슴에 몸을 기대며 어떻게든 넘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심판은 ‘이젠 끝났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힘빠진 두 팔을 들어 뭔가 심판에게 말하는 듯했다. “그게 뭐였냐”고 기자가 최근 그에게 물었다. “다시 싸우겠다고, 할 수 있다고 했죠.” 심판은 등을 돌렸다. 12라운드 종료 28초를 남기고 진 이 경기(1991년 WBC플라이급 도전)를 끝으로 그는 링을 떠났다. 그는 “88년 챔피언벨트를 반납한 뒤 다시 링에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서글픈 경기를 지우고 싶어했지만, 그렇지 않다. 11라운드에서 다운을 뺏은 뒤 마지막 라운드에서 KO로 이기겠다며 쉴새없이 밀어붙인 그 저돌성, 두번을 쓰러지고도 ‘난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또 싸우겠다던 모습은 충분히 ‘짱구’다웠으니까. 전처와 헤어지며 재산을 잃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뒤 만난 지금의 아내에게 “꼭 다시 챔피언이 돼서 결혼식을 올리자”며 링으로 돌아온 그 뜨거운 사랑을 아내만은 알고 있을테니. 그는 여전히 ‘짱구 퍼머’를 하고 있었다. “이게 편해요. 머리 만지기도 좋고.” 원래 생머리였던 그는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자, 여성 프로모터 심영자(64) 회장 권유로 머리를 볶았다.
부산에서 2남3녀 막내로 태어난 그는 열두살에 글러브를 꼈다. 전국체전 부산대표로도 뽑혔던 그는 프로선수 주먹을 맞아주는 스파링파트너였다. “부산에 ‘짱구’란 놈이 있는데 물건될 놈”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는 80년 프로로 전향했다. 스무살이던 83년. 그는 일라리오 사파타를 3라운드 KO로 꺾고 WBC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벨트를 차며 장정구(44)를 세상에 알렸다. “사파타가 등을 돌리고 심판이 손을 흔들 때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었죠.” 광복절이 며칠 지난 84년 무더운 여름. 이쪽 코너에서 저쪽 코너로 일본 도까시끼 까스오를 몰아가며 오른손 스트레이트로만 여섯번을 때려 9회 KO로 4차방어에 성공한 그 경기를 떠올리면서 그는 무심결에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는 일본 언론이 ‘150년 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선수’라고 호들갑을 떨었던 오하시 히데유끼를 88년 6월 적지에서 이겨 아시아 최초로 15차 방어에 성공했다. 5년4개월의 장수였다.
“당시 5차방어까지 한 국내선수가 없었으니 6차까지만 가자고 생각했고, 이후엔 내 이름이 정구(正九)이니 9차방어까지 목표를 세웠고, 그걸 넘어선 뒤엔 매 경기 최선을 다하니 15차까지 갔죠. 매번 10㎏ 넘게 체중을 뺐고, 훈련일지도 매일 꼼꼼히 썼죠. 국민들이 아니었으면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한번 경기할 때마다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 한채를 살 수 있었던 7000만~8000만원대 대전료를 받았다. 서울 광장동 52평 워커힐아파트도 있었지만, 전처와 결별하며 돈도 꽤 잃었다. “머리가 복잡해 운동에 전념할 수 없었다”는 그는 전성기인 스물다섯 나이에 스스로 벨트를 내놓았다. 89년 복귀했지만 세번 연속 진 그는 “100m를 달리다 멈춘 뒤 또 뛰려니 쉽지 않았다”며 글러브를 벗었다. 일산에서 아내, 두 딸과 같이 전세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그는 한때 프로모션 일도 했고, 현재 건설회사 사장 직함과 한 정당의 ‘아름다운 세상·아름다운 사람’ 단장 명함도 갖고 있다. 2000년엔 ‘20세기 위대한 복서’ 25명에 뽑혀 멕시코에도 다녀왔다. 그가 주먹을 빙빙 돌리면 그건 상대가 쓰러지기 직전이란 신호였다. ‘챔피언 중의 챔피언’이었던 장정구는 “내가 결심한 만큼 약속지키면 결과를 얻더라. 또 그걸 못했으면 왜 그랬는지 늘 반성해야한다는 걸 복싱을 통해 배웠다. 이젠 욕심이 없다. 그저 우리 딸들이 올바르게 컸으면 하는 것 뿐”이라고 했다. 세계를 휘어잡은 그의 손은 ‘짱구퍼머’를 뒤로 쓸어넘기고 있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아시아 최초 15차 방어 성공하기도
“벨트 반납뒤 링에 돌아오지 말것을…” 오른손 훅에 턱이 걸렸다. 아…. 그가 쓰러졌다. 일어났지만 비틀거렸다. 그러더니 ‘쿵’하며 링으로 몸이 또 무너졌다. 다시 몸을 일으켰다. 주먹이 얼굴에 날아들었다. 몸이 뒤로 젖혀지고는 링에 부딪혔다. 무릎을 꿇고 숨을 힘겹게 내뱉던 그가 간신히 일어났다. 심판 가슴에 몸을 기대며 어떻게든 넘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심판은 ‘이젠 끝났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힘빠진 두 팔을 들어 뭔가 심판에게 말하는 듯했다. “그게 뭐였냐”고 기자가 최근 그에게 물었다. “다시 싸우겠다고, 할 수 있다고 했죠.” 심판은 등을 돌렸다. 12라운드 종료 28초를 남기고 진 이 경기(1991년 WBC플라이급 도전)를 끝으로 그는 링을 떠났다. 그는 “88년 챔피언벨트를 반납한 뒤 다시 링에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서글픈 경기를 지우고 싶어했지만, 그렇지 않다. 11라운드에서 다운을 뺏은 뒤 마지막 라운드에서 KO로 이기겠다며 쉴새없이 밀어붙인 그 저돌성, 두번을 쓰러지고도 ‘난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또 싸우겠다던 모습은 충분히 ‘짱구’다웠으니까. 전처와 헤어지며 재산을 잃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뒤 만난 지금의 아내에게 “꼭 다시 챔피언이 돼서 결혼식을 올리자”며 링으로 돌아온 그 뜨거운 사랑을 아내만은 알고 있을테니. 그는 여전히 ‘짱구 퍼머’를 하고 있었다. “이게 편해요. 머리 만지기도 좋고.” 원래 생머리였던 그는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자, 여성 프로모터 심영자(64) 회장 권유로 머리를 볶았다.
장정구
한번 경기할 때마다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 한채를 살 수 있었던 7000만~8000만원대 대전료를 받았다. 서울 광장동 52평 워커힐아파트도 있었지만, 전처와 결별하며 돈도 꽤 잃었다. “머리가 복잡해 운동에 전념할 수 없었다”는 그는 전성기인 스물다섯 나이에 스스로 벨트를 내놓았다. 89년 복귀했지만 세번 연속 진 그는 “100m를 달리다 멈춘 뒤 또 뛰려니 쉽지 않았다”며 글러브를 벗었다. 일산에서 아내, 두 딸과 같이 전세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그는 한때 프로모션 일도 했고, 현재 건설회사 사장 직함과 한 정당의 ‘아름다운 세상·아름다운 사람’ 단장 명함도 갖고 있다. 2000년엔 ‘20세기 위대한 복서’ 25명에 뽑혀 멕시코에도 다녀왔다. 그가 주먹을 빙빙 돌리면 그건 상대가 쓰러지기 직전이란 신호였다. ‘챔피언 중의 챔피언’이었던 장정구는 “내가 결심한 만큼 약속지키면 결과를 얻더라. 또 그걸 못했으면 왜 그랬는지 늘 반성해야한다는 걸 복싱을 통해 배웠다. 이젠 욕심이 없다. 그저 우리 딸들이 올바르게 컸으면 하는 것 뿐”이라고 했다. 세계를 휘어잡은 그의 손은 ‘짱구퍼머’를 뒤로 쓸어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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