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 감독이 베이징올림픽 예선 재경기에서 일본을 상대로 한국팀 골이 터지자 선수들과 함께 환호하고 있다. 도쿄/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부상으로 선수 생활 포기…IMF로 맡던 팀 해체
“나이스 슛” 연발 칭찬으로 선수 기 살리는 ‘덕장’
“나이스 슛” 연발 칭찬으로 선수 기 살리는 ‘덕장’
36.5˚C 데이트 / 올림픽 티켓 따낸
남자핸드볼 김태훈 감독 종료 1분 전 백원철의 쐐기골이 터졌다. 남자핸드볼대표팀 김태훈(45) 감독은 승리를 확신한 듯 어퍼커트 세리머니를 날렸다. 마침내 경기종료 버저가 울렸다. 그는 두 팔을 높이 치켜들고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소리쳤다. 지난달 30일 저녁, 일본의 심장 도쿄 요요기국립체육관을 가득 채운 1만2천여명 한가운데 그가 우뚝 섰다. 그는 그렇게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만끽했다. 김 감독은 일본을 꺾고 올림픽 3회 연속 출전에 성공한 한국남자핸드볼팀의 선장이다. 그는 일본과의 재경기를 앞두고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렸다. 객관적인 전력상 여자는 일본과 10골 정도 나지만, 남자는 4~5골 차이다. 그 정도 간격은 일본 홈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으로 반전될 수도 있다. 이런저런 생각에 태릉선수촌에서 불면의 밤을 보내기 일쑤였다. 지난 28일 마침내 결전지 일본으로 출국하기 직전, 아내 차향숙(42)씨한테서 “꼭 이길 거야. 경기 잘하고 오세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그는 비장했다. “이번이 내 인생의 마지막 올림픽 출전이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이기고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핸드볼 인생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현역시절 태극마크를 달아보지 못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너무 재미있어서” 시작한 핸드볼이었지만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일찍 코트를 떠났다. 지도자 생활은 순탄한 듯 했다. 1991년, 만 스물여덟에 최연소 대학팀(경희대) 사령탑에 오른 그는 97년 신생팀 현대석유화학 감독직을 맡았다. 그런데 국제구제금융(IMF) 사태가 터지면서 불과 10개월만에 팀이 해체됐다. “인기종목이었다면 해체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박탈감과 좌절감이 심했어요.” 갈 곳 잃은 선수들을 모아 1년 가까이 충남도청에 소속됐다. 전국체전만 나가는 임시방편적인 팀이었다. 다행히 99년 하나은행에 인수됐고, 대표팀 사령탑에 오르며 선수시절 꿈꾸던 태극마크도 달았다. 그는 “선수시절 한을 풀었으니 그래도 나는 복받은 사람”이라고 겸손해 했다. 그는 틈만나면 선수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덕장이다. 훈련할 때 그의 입에선 ‘나이스 슛’, ‘좋아, 좋아’라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일본과 재경기를 앞두고 선수들 호텔방을 배정할 때도 인터넷 사용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방을 따로 배정해줬다. 재경기 전날 마지막 훈련 때는 단점을 지적하기 보다는 장점을 극대화시켰다. 마침내 올림픽 티켓을 거머쥐고 귀국하는 길에 그는 선수들에게 “너희들이 왜 이렇게 예뻐보이냐”며 흐뭇해 했다. 김 감독은 “한국 남자핸드볼은 유럽에 비해 신장과 파워가 달릴 뿐 경기력은 세계 최고수준”이라고 자부했다. 그래서 정한 목표가 베이징올림픽 4강이다. 88년 서울올림픽 은메달의 영광을 베이징에서 재현하겠다는 각오다. 그는 올림픽 티켓을 따낸 뒤 “영광은 짧고 시련은 길다”며 “오는 8월 베이징에서 ‘생애 최고의 순간’ 2탄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글 도쿄/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남자핸드볼 김태훈 감독 종료 1분 전 백원철의 쐐기골이 터졌다. 남자핸드볼대표팀 김태훈(45) 감독은 승리를 확신한 듯 어퍼커트 세리머니를 날렸다. 마침내 경기종료 버저가 울렸다. 그는 두 팔을 높이 치켜들고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소리쳤다. 지난달 30일 저녁, 일본의 심장 도쿄 요요기국립체육관을 가득 채운 1만2천여명 한가운데 그가 우뚝 섰다. 그는 그렇게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만끽했다. 김 감독은 일본을 꺾고 올림픽 3회 연속 출전에 성공한 한국남자핸드볼팀의 선장이다. 그는 일본과의 재경기를 앞두고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렸다. 객관적인 전력상 여자는 일본과 10골 정도 나지만, 남자는 4~5골 차이다. 그 정도 간격은 일본 홈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으로 반전될 수도 있다. 이런저런 생각에 태릉선수촌에서 불면의 밤을 보내기 일쑤였다. 지난 28일 마침내 결전지 일본으로 출국하기 직전, 아내 차향숙(42)씨한테서 “꼭 이길 거야. 경기 잘하고 오세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그는 비장했다. “이번이 내 인생의 마지막 올림픽 출전이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이기고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핸드볼 인생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현역시절 태극마크를 달아보지 못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너무 재미있어서” 시작한 핸드볼이었지만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일찍 코트를 떠났다. 지도자 생활은 순탄한 듯 했다. 1991년, 만 스물여덟에 최연소 대학팀(경희대) 사령탑에 오른 그는 97년 신생팀 현대석유화학 감독직을 맡았다. 그런데 국제구제금융(IMF) 사태가 터지면서 불과 10개월만에 팀이 해체됐다. “인기종목이었다면 해체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박탈감과 좌절감이 심했어요.” 갈 곳 잃은 선수들을 모아 1년 가까이 충남도청에 소속됐다. 전국체전만 나가는 임시방편적인 팀이었다. 다행히 99년 하나은행에 인수됐고, 대표팀 사령탑에 오르며 선수시절 꿈꾸던 태극마크도 달았다. 그는 “선수시절 한을 풀었으니 그래도 나는 복받은 사람”이라고 겸손해 했다. 그는 틈만나면 선수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덕장이다. 훈련할 때 그의 입에선 ‘나이스 슛’, ‘좋아, 좋아’라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일본과 재경기를 앞두고 선수들 호텔방을 배정할 때도 인터넷 사용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방을 따로 배정해줬다. 재경기 전날 마지막 훈련 때는 단점을 지적하기 보다는 장점을 극대화시켰다. 마침내 올림픽 티켓을 거머쥐고 귀국하는 길에 그는 선수들에게 “너희들이 왜 이렇게 예뻐보이냐”며 흐뭇해 했다. 김 감독은 “한국 남자핸드볼은 유럽에 비해 신장과 파워가 달릴 뿐 경기력은 세계 최고수준”이라고 자부했다. 그래서 정한 목표가 베이징올림픽 4강이다. 88년 서울올림픽 은메달의 영광을 베이징에서 재현하겠다는 각오다. 그는 올림픽 티켓을 따낸 뒤 “영광은 짧고 시련은 길다”며 “오는 8월 베이징에서 ‘생애 최고의 순간’ 2탄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글 도쿄/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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