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일본 요요기국립체육관에서 열린 핸드볼 여자부 일본과의 재경기에서 우승한 한국팀이 활짝 웃으며 관중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내가 핸드볼에 미친 이유
2005년 4월, 사회부 법조팀에서 일하다가 스포츠부로 옮겼다. 당시 스포츠부장은 내게 축구 야구 농구 배구 골프 외에 나머지 군소종목 중 너덧개를 택하라고 했다. 나는 가장 먼저 핸드볼과 하키를 골랐다. 올림픽 효자종목이면서도 국내에서는 찬밥 신세를 받는 두 종목에 남달리 애정이 갔다. 특히 핸드볼은 올림픽 때마다 흥미있게 지켜 본 종목이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여자부 결승전은 이른 새벽에 열리는 바람에 녹화까지 해뒀다가 다음날 아침에 보기도 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결승전은 당시 서울중앙지검 기자실에서 여러 기자들이 함께 모여 손에 땀을 쥐며 본 기억이 있다.
그러던 내가 핸드볼에 푹 빠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2005년 12월 러시아에서 열린 세계여자핸드볼선수권대회에 풀기자로 운좋게 동행한 것이다. 풀기자란 신문·방송사 핸드볼 담당기자들이 순번을 정해 해외 대회에 한명씩 파견하는 것이다. 손에 땀을 쥐는 명승부가 계속됐고, 나는 빠르고 격렬한 핸드볼 경기에 그만 반해 버렸다.
핸드볼은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럭비가 합쳐진 종합스포츠라고 한다. 축구처럼 양쪽 골문을 놓고 뛰어다니고, 야구처럼 공을 던지고 받고, 농구처럼 드리블도 있다. 또 배구의 스파이크와 핸드볼의 슛은 점프와 팔의 궤적이 똑같다. 여기에 럭비에서나 볼 수 있는 격렬한 몸싸움까지 있다.
세계선수권대회의 추억은 나 자신을 국내 핸드볼경기장으로 내몰았다. 핸드볼 국내 대회를 취재하면서 새삼 열악한 현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선수들은 몸 풀 때가 없어 체육관 앞마당 시멘트 바닥 위에서 던지기 받기를 하고, 체육관 복도를 몇바퀴 돌며 러닝을 한다. 국가대표조차 팀 닥터가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이번에 여자대표팀은 사상 처음으로 한의사를 팀 닥터로 동행시켰다. 친구가 대표팀 핸드볼 코치인 그 한의사는 한의원도 후배에게 맡긴 채 자원봉사차 대표팀에 합류한 것이다.
핸드볼에 쏟아진 믿기지 않는 관심
1월28일 오전 7시30분. 서울 김포공항에서 남자 대표선수들과 만났다. 평소 친분있는 김태훈 남자대표팀 감독(하나은행 감독)이 반갑게 맞아줬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언론사 기자들도 꽤 많이 눈에 띄었다. 달랑 한명만 가던 풀기자가 아니라 여러 기자가 핸드볼 취재를 위해 해외에 나간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후배가 작가로 일하는 <문화방송>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프로그램에 출국 직전의 윤경신 선수의 전화인터뷰를 주선해줬다. 오전 9시20분. 일본 하네다공항을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김태훈 감독과 나란히 앉았다. “경기 잘 하고 오라”는 아내에게 온 문자 얘기도 전해줬다. 그의 결의는 비장했다. “핸드볼 인생을 걸고 반드시 이기겠다”고 했다. 일본과의 경기를 앞두고 태릉선수촌에서 얼마나 많은 번뇌의 시간을 보냈을까.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을까. 그는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오전 11시. 일본 하네다공항에 도착하자, 수많은 일본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공항을 빠져나갈 때는 여기저기서 플레시가 터졌고, 선수들이 버스에 탑승한 뒤에도 차창 너머로 선수들 표정 하나하나까지 카메라에 담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요요기국립체육관에서 첫 훈련이 시작된 이날 오후 4시에도 일본 취재진들은 체육관 앞에 도열해 한국 선수들을 향해 연방 카메라 플레시를 터뜨렸다.
1월29일. 드디어 한국과 일본의 여자부 재경기가 열리는 날이다. 경기 시작 6시간을 앞두고 한국과 일본 핸드볼협회 간부들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회견 말미에 한 기자가 일본협회 간부들에게 한-일간 핸드볼 전력차이를 물었다. 와타나베 요시히데 일본핸드볼협회 회장은 “개인적으로는 일본이 잘한다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일본기자들도 모두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농담이라는 뜻이었다. 그들도 일본의 핸드볼 실력이 한국에 뒤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와타나베 회장은 그렇게 농담을 던진 뒤 정확한 대답은 이치하라 노리히키 부회장이 말해줄 것이라며 떠넘겼다. 이치하라 부회장은 “50대50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일본선수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 자신도 한국의 핸드볼 실력이 한수 위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후 7시. 요요기국립체육관은 한국쪽 붉은악마와 일본쪽 울트라닛폰의 응원 열기로 가득찼다. 체육관엔 빨간색과 파란색 딱 두가지 색깔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분명 한국팀 전력이 10골 정도 앞서는데도 엄청난 긴장감이 몰려왔다. 나도 이럴진대 우리 선수들 마음은 오죽했으랴. 경기 전 애국가가 울렸다. 콧등이 시큰거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중학교 졸업 후 눈물 한방울 흘려본 적이 없는 냉혈한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애국가만 울리면 이렇게 된다. 대학시절 6·10항쟁 때 서울시청 앞에서 울려퍼진 애국가를 들으면서도 그랬고,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애국가 연주만 나오면 이렇게 된다.
초조함과 긴장감은 경기시작 불과 7분여가 지나면서 사라졌다. 한국이 6-1로 달아나자 다급해진 덴마크 출신 바워 버트 일본 감독이 경기시작 불과 7분47초 만에 작전시간을 요청한 것이다. 핸드볼에서 전·후반 1개씩 밖에 없는 작전시간을 일찌감치 써버릴 만큼 다급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실력 차이는 더욱 확연해 졌고, 일본여자핸드볼이 한국을 꺾고 32년 만에 올림픽 본선 진출을 이루려는 꿈은 그저 희망사항으로 끝났다. 다음날 아침, 한국여자대표팀이 일본을 34-21로 대파한 소식을 일제히 1면 주요기사와 사회면, 체육면까지 핸드볼 기사로 도배질했다.
남녀 올림픽 동반진출과 흥겨운 뒷풀이
1월 29일, 여자팀이 일본을 대파하고 베이징올림픽 본선 티켓을 거머쥔 뒤 한국선수단은 조촐하게 생맥주 파티를 벌였다. 해외파 선수들은 다음날 새벽같이 유럽으로 떠나야했다. 하지만 조일현 대한핸드볼협회 회장을 비롯한 협회 임원과 시·도협회 임원, 실업 및 대학팀 감독 등 핸드볼인 30여명은 한국선수단 숙소에서 40여분 떨어진 도쿄시외 가마타라는 곳에서 흥겨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이런 흥겨움 속에는 한국남자대표팀도 반드시 일본을 꺾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1월30일. 요요기국립체육관 주변 상황은 전날과 판이하게 달랐다. 엄청난 인파가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체육관 안의 함성도 전날보다 두배는 크게 느껴졌다. 한국 응원단 숫자도 전날보다 갑절 가까이 많아보였다. 일본 응원단은 그보다 다섯배쯤 많아보였다. 요요기국립체육관은 사각 모서리 관중석에서는 경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런 자리까지 빈틈없이 관중이 채워졌다. 공식집계로는 1만500여명이 입장했고, 두나라 협회 관계자와 기자들, 자원봉사자, 선수단 등 을 합하면 무려 1만2천명이 운집한 것이다.
남자대표팀은 일본과 객관적인 전력상 4~5골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전날 숙달된 탓인지, 경기 시작 전 떨림은 한결 덜했다.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때 20-21로 진 뒤 26년 동안 19차례 맞붙어 17승2무로 한번도 지지 않았다는 믿음도 있었다. 전반 중반 이후 2~3골 차로 앞서갔다. 후반 15분께 23-17로 벌렸을 때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한국은 이후 8분 동안 골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일본 역시 역전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실책을 연발했다. 그리고 백원철이 막판 쐐기슛 3골을 몰아넣으며 한국은 28-25, 감격적인 3골 차 승리를 안았다. 일본 실업팀 다이도스틸 소속인 백원철은 경기 뒤 인터뷰 때 일본기자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밤 10시. 대회가 끝나고 한국선수단은 국제핸드볼연맹(IHF)이 마련한 ‘송별파티’에 참석했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단연 한국팀 문지기 커플 강일구와 오영란이었다. 강일구는 17개, 오영란은 13개를 선방하며 부부가 무려 30개의 일본 슛을 막아냈다. 부부는 나란히 대회 최우수선수(MVP)에 뽑혔다. 이들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동료 선수들은 “강일구”, “오영란”을 연호하며 축하해줬다.
밤 12시. 한국남녀 선수단은 숙소 근처 한국인식당으로 옮겨 소주 파티를 벌였다. 선수들은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했다. 여자팀 통역을 맡았던 임오경 히로시마 메이플레즈 감독도 동참했다. 남자대표팀 김태훈 감독은 조금은 흥분이 가라앉은 듯 나에게 “영광은 짧고 시련은 길다”는 말을 털어놓았다. 이제 한국에 가면 태릉선수촌에서 올림픽을 앞두고 본격적인 담금질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반짝 관심으로는 ‘7천만원 전세’ 벗어날 수 없어
1월31일.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대표팀 수문장 강일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와 나눈 얘기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인천에서 전세 7천만원짜리 24평 아파트에 산다”는 것이었다. 인기종목 선수들은 국가대표를 기피하면서 수억원대 연봉에 외제 승용차 끌고다니는데, 국민들에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환희와 감격을 안긴 국가대표 최고스타 커플은 전세방을 전전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은 해외진출로 해결할 수 있다. 핸드볼 선수들이 해외에 진출하면 대개 1억원의 연봉을 받는다. 하지만 해외진출도 쉽진 않다. 구단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제안이 와도 쉽게 나갈 수 없다.
핸드볼에 쏟아진 관심이 얼마나 지속될지 그 척도를 가늠하는 대회가 있다. 바로 4일과 5일 안동에서 열리는 2008핸드볼큰잔치 준결승전과 결승전이다. 핸드볼큰잔치는 88서울올림픽 금메달(여자)과 은메달(남자)을 기념해 만든, 가장 큰 핸드볼대회다. 과거 농구대잔치처럼 핸드볼이 겨울스포츠로 정착하는 데 큰 기여를 한 대회다. 1년 중 가장 큰 핸드볼대회의 준결승과 결승전이, 국가대표 선수들이 모두 소속팀에 복귀한 가운데 열리는 것이다. 고향이 경북 안동이거나 그 근처인 분들은 설 연휴 고향 방문 길에 한번쯤 안동실내체육관에 들러 핸드볼 열기를 느껴보시는 건 어떨까. 한국 핸드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요즘만 같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29일, 일본 요요기국립체육관에서 열린 핸드볼 여자부 일본과의 재경기에서 한국 선수가 골을 넣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1월28일 오전 7시30분. 서울 김포공항에서 남자 대표선수들과 만났다. 평소 친분있는 김태훈 남자대표팀 감독(하나은행 감독)이 반갑게 맞아줬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언론사 기자들도 꽤 많이 눈에 띄었다. 달랑 한명만 가던 풀기자가 아니라 여러 기자가 핸드볼 취재를 위해 해외에 나간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후배가 작가로 일하는 <문화방송>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프로그램에 출국 직전의 윤경신 선수의 전화인터뷰를 주선해줬다. 오전 9시20분. 일본 하네다공항을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김태훈 감독과 나란히 앉았다. “경기 잘 하고 오라”는 아내에게 온 문자 얘기도 전해줬다. 그의 결의는 비장했다. “핸드볼 인생을 걸고 반드시 이기겠다”고 했다. 일본과의 경기를 앞두고 태릉선수촌에서 얼마나 많은 번뇌의 시간을 보냈을까.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을까. 그는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오전 11시. 일본 하네다공항에 도착하자, 수많은 일본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공항을 빠져나갈 때는 여기저기서 플레시가 터졌고, 선수들이 버스에 탑승한 뒤에도 차창 너머로 선수들 표정 하나하나까지 카메라에 담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요요기국립체육관에서 첫 훈련이 시작된 이날 오후 4시에도 일본 취재진들은 체육관 앞에 도열해 한국 선수들을 향해 연방 카메라 플레시를 터뜨렸다.
29일 여자부 재경기가 있기 6시간 전 열린 한·일 핸드볼협회 간부들의 기자회견.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응원의 열기는 뜨거웠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일본 응원단 울트라닛폰.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주연배우 문소리·김정은이 한국 응원단과 함께 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여자팀 우승의 순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남자부의 경기가 있던 30일 요요기국립체육관 주변을 가득 메운 인파들. 여자부 경기가 있던 그 전날에 비해 훨씬 많은 수인 1만500여명이 운집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골에 환호하는 김태훈 감독과 코치진, 선수들. 이날 한국팀은 28-25로 3골 차 승리를 안았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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